연기로 그린 초상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최근 들어 1940~50년대에 출간된 고전(에 가까운) 작품들을 많이 읽게 됐는데,

세련미나 화려함에서는 현대 작품들에 비해 다소 투박해 보이긴 해도

그윽한 아날로그의 정취와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인간미는 훨씬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연기로 그린 초상’(1950)이와 손톱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빌 밸린저의 작품입니다.

치밀한 복수극과 정교한 법정 공방전이 전개되는 이와 손톱

웰 메이드 흑백영화처럼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게 읽은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연기로 그린 초상은 큰 틀이나 전개방법에서 이와 손톱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 작품입니다.

 

시카고에서 영세 수금대행업으로 먹고 사는 대니 에이프릴에겐 평생의 로망이 있습니다.

16살 때 우연히 목격한 또래의 아름다운 소녀를 꼭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어느 날, 10년 전 한 지역신문이 개최한 미인대회 수상자의 사진을 보게 된 대니는

그 사진 속 여인 크래시 알모니스키가 자기가 찾던 바로 그 소녀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난 10년간 그녀가 살던 집들, 그녀가 다녔던 학원과 회사 등을 찾아다니며

크래시의 10년간의 발자취를 쫓는 대니의 집요한 탐문이 시작됩니다.

 

한편, 번갈아 전개되는 챕터에서는 크래시의 지난 10년의 시간이 소개됩니다.

크래시는 알코올중독인 아버지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인대회를 이용했고

그 뒤로는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사기와 거짓말을 통해 한 계단씩 신분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런 크래시 앞에 집요하게 그녀를 찾아 헤매던 대니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나타나고

두 사람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격정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작품 속에서 대니 스스로 고백하듯 크래시 찾아 헤매기는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스치듯 지나간 한 소녀를 평생 마음에 품은 일도,

미인대회 수상자 사진 속의 크래시를 그 소녀라고 여기곤 일도 내팽개친 채 찾아 헤매는 일도

어쩌면 환상의 여자를 찾는 무모하고 어이없는 행각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16살의 희미한 기억과 신문 속 사진이 전부일 뿐인 크래시는 대니에겐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떠올리려 해도, 그려보려 해도 금세 허공으로 사라지고 마는 연기로 그린 초상처럼 말이죠.

하지만 대니는 크래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순수하고, 사랑스런 여자라 확신합니다.

그런 심정으로 크래시가 남긴 아주 작고 희미한 흔적들에 목매는 대니를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다가도 안쓰러움과 애절함까지 느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독자 입장에선 대니의 챕터에 이은 크래시의 챕터를 읽으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크래시는 대니의 기대나 로망과는 180도 다른 욕망덩어리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본명 외에 캐서린 앤드루스, 캐런 앨리슨, 캔디스 오스틴, 워터베리 부인, 캔디스 파워스 등

상황에 따라 이름을 바꿔 위장하며 새 신분을 얻곤 했던 크래시는

남자를 이용하는 것 외엔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몸과 마음을 이용하여 팜므 파탈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이고 지독하고 캐릭터로 발전하는데,

과연 대니가 크래시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크래시는 영세 수금대행업자에 불과한 대니의 짝사랑을 어떤 표정과 심정으로 대할까?”

이런 궁금증 때문에라도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28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둘의 만남은 그중에서도 아쉬울 만큼 짧게 그려집니다.

물론 짧긴 해도 엄청 굵고 두껍고 긴장감 넘치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그려지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론 수십 페이지 정도는 더 할애됐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약간은 동어반복 같았던 대니의 크래시 찾기과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 점과 함께

이 짧고 급한 클라이맥스와 엔딩 때문에 별 0.5개를 빼고 말았는데,

둘의 만남 이후 사건도 좀 더 많고, 우여곡절도 좀 더 겪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습니다.

 

아무튼...

이와 손톱에서도 맛봤던 빌 밸린저 특유의 막판 뒤통수치기는 이번에도 여전했는데

덕분에 속도감과 긴장감과 반전의 매력이 가득한 단편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여러 개의 이름으로 가린 채 거짓말투성이의 인생을 살아온 크래시도,

, 잡히지 않는 연기 같은 환상의 여인을 쫓아 집요한 추격전을 펼친 대니도

엎치락뒤치락 롤러코스터를 탄 끝에 그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니와 크래시를 기다리는 건 끔찍한 비극일까요? 달달한 해피엔딩일까요?

궁금한 독자라면 빌 밸린저의 매력적인 작품을 통해 꼭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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