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문도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 시공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뉴기니의 작은 섬에서 패전을 맞은 코스케는 귀환 도중 사망한 전우로부터

자신이 살아 돌아가지 못하면 세 여동생이 살해당할 거란 유언을 받습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전사한 전우의 고향인 세토 내해의 작은 섬 옥문도로 향한 코스케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분위기에다 에도 시대 죄인들의 유형지였다는 이력을 가진 탓인지

옥문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더구나 세 여동생은 물론 전우가 후계자로 예정됐던 (섬을 지배하는) 기토 가문의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뭔가를 숨기거나 상식 밖의 행동으로 코스케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섬사람들을 탐문하며 살인의 기운을 포착하려던 코스케의 의심은 점점 증폭됐지만

결국 단서 하나 못 잡은 상태에서 전우의 예언대로 악몽 같은 살인사건이 차례로 일어납니다.

 

혼진 살인사건’, ‘백일홍 나무 아래등 두 편의 중단편집에 이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세 번째 작품이자 첫 장편인 옥문도를 읽었습니다.

옥문도는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로 시리즈 중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인데

앞서 읽은 두 중단편집보다 깊이와 무게감이 비교할 수 없이 육중하게 느껴지는 건

장편 자체의 힘과 함께 폐쇄적 공간이자 불길함으로 휩싸인 옥문도란 섬의 마력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해적과 죄수들의 섬이었던 탓에 복잡한 혈연관계와 지독한 배타성을 지녔으며

최근 전쟁의 참화까지 입은 옥문도는 외지인으로선 견딜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입니다.

몇 대 전부터 유력한 선주인 기토 가문에 의해 실질적인 지배가 이뤄지면서 안정을 찾았지만

젊은 후계자 후보들이 침략 전쟁에 징집된 이후 옥문도엔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런 와중에 전우가 예고한 참혹한 살인사건을 막고자 정체를 감추고 옥문도에 온 코스케로선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조차 없는 섬의 폐쇄성이 시한폭탄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섬 주민들은 모두 상식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기묘한 구석을 갖고 있어요.

(중략) 본토 사람 따위는 생각도 못할 괴상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거에요.

거기다 저 전쟁이 있었지요. 모두 크든 작든 미쳐 있습니다.” (p139~140)

 

섬을 지배하고 있는 기토 본가(本家)와 분가(分家)의 대립과 갈등,

전쟁에 징집된 기토 가문 후계자 후보들의 생사에 과도하게 촉각을 곤두세운 섬사람들,

살해당할 거란 예언 속에 등장하는 세 자매의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 난잡한 언행 등

코스케에겐 모든 것이 섬의 이름만큼이나 불온하게만 보입니다.

결국 코스케가 손 쓸 틈도 없이 기이하고 잔혹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주요 인물들의 알리바이는 확실하고 단서들은 하나같이 모호할 뿐입니다.

누구도 진실을 말하는 것 같지 않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불투명한 탓에

코스케의 수사는 답보를 거듭할 뿐 아니라 섬사람들의 의심까지 받기에 이릅니다.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지만) ‘옥문도는 일본색이 워낙 강한 작품입니다.

일본의 전통문화나 역사에 대한 언급이 워낙 많아서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고,

특히 단시(短詩)인 하이쿠를 비롯 일본어 유희자체가 사건 곳곳에 자주 또 깊이 끼어들어서

여느 작품과 달리 각주를 꼼꼼히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꽤 많습니다.

, 시리즈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렇듯 패전 이후 봉건 색채가 짙게 남아있는 지방을 무대로

호러에 가까운 기괴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강한 일본색의 흔적 중 하나인데,

오래 전에 읽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다음 작품인 이누가미 일족역시

사건과 배경과 작품 안에 흐르는 분위기가 옥문도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암울한 역사와 워낙 밀접한 시대적 배경이라 무척 민감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비롯 참전과 패전, 전사와 귀환을 겪은 인물들을 통해

명분 없는 전쟁과 그것이 낳은 비극에 몰두하고 있어서 크게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또 근대와 봉건이 충돌하는 국면에서 몰락한 기층 지배계급의 비극을 주된 소재로 삼은 점은

(비록 그 시대를 살아본 건 아니더라도) 딱히 일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한 독자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코스케의 빛나는 추리는 옥문도의 불길한 기운 속에서도 실마리를 찾기에 이르고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그릇되고 허망한 봉건적 욕망이란 점까지 포착해냅니다.

하지만 그가 찾아낸 진실은 관련자 누구 하나 살인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과 함께

결국 옥문도의 비극은 지독한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는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씁쓸한 여운이 강하긴 하지만 코스케에게 딱 어울리는 엔딩이라고나 할까요?

 

독자에 따라 막판의 미스터리 해법에 대해 살짝 실망할 수도 있을 텐데,

다소 허술해 보이거나 비약이 심하다고 여겨지는 대목들이 가끔 눈에 띄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게 그 시대를 그린 아날로그 미스터리의 매력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시리즈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단점조차 애써 포용하고 싶은 사심이 있는 건 맞지만

(억지이긴 해도) 시대에 어울리는 서사와 주인공, 그것이 이 시리즈의 진짜 미덕 아닐까요?

이미 한 번 읽은 작품인데도 비슷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다음 작품 이누가미 일족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감에 들뜨는 것 역시 사심 팬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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