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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1999년 일본에서 출간된 뒤 한국에는 2007년에 처음 소개됐으며
이후 2019년 완전히 리모델링되어(번역 정경진, 스핑크스) 복간되기도 한 작품입니다.
일본 미스터리의 팬이라면 진작 읽었어야 할 필독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계속 미적거리다가 이제야 2007년 판으로 만나게 됐습니다.
두 여고생을 교살하고 목에 가위를 꽂은 수법 때문에 ‘가위남’이란 별명을 얻은 살인범 ‘나’는
6개월 만에 세 번째 희생자로 여고생 다루미야 유키코를 선택하곤 집요한 관찰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수법을 그대로 모방한 누군가가 먼저 유키코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고
‘나’는 엉뚱하게도 시신을 제일 먼저 발견한 목격자로서 경찰의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됩니다.
누가, 왜, 그것도 자신의 수법을 모방해 유키코를 살해한 건지 전혀 알 수 없던 ‘나’는
범인을 잡기 위해 스스로 탐정이 되어 목격자를 찾고 유키코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다시 나타난 ‘가위남’으로 인해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메구로니시 경찰서는
경시청 과학수사연구소의 범죄심리분석관 호리노우치의 지휘 아래 ‘가위남’ 찾기에 나섭니다.
호리노우치는 경시청 수사1과 대신 아직 신참 티를 못 벗은 이소베를 비롯
‘2군’ 냄새가 폴폴 나는 메구로니시의 형사들과 함께 프로파일링과 탐문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일명 ‘가위남’인 ‘나’의 1인칭 시점 챕터와 메구로니시 수사팀의 챕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범인의 정체와 목표와 행적을 수사팀보다 훤히 꿰뚫고 있는 상태에서
엉뚱한 곳에서 헛발질만 남발하는 수사팀의 수난을 전지적 시점에서 들여다보게 되는데,
이런 구조의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지독한 악의를 지닌 범인이 연이어 살인을 저지르거나
슈퍼히어로 주인공이 거듭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진상에 다가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가위남’은 실은 그런 일반적 구조와는 결이 아주 많이 다른 작품입니다.
사건은 단순하고, 범인은 악의라곤 전혀 없으며, 수사팀도 히어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인데
그래선지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과연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몸통은 ‘가위남’의 모방범 찾기와 수사팀의 ‘가위남’ 찾기로 전개되지만
그에 못잖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건 다소 의외의 내용들입니다.
무엇보다 엽기적인 소시오패스로 보였던 ‘가위남’의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데,
그는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이면서 주말마다 온갖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인물입니다.
또 ‘해리성 인격장애’로 인해 또 다른 자아인 ‘의사’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데,
그 대화에 따르면 ‘가위남’은 일반적인 소시오패스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살인범입니다.
실은 그의 범행동기엔 성적 욕망도, 살인의 희열도, 희생자에 대한 지배욕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악의조차 없는 무동기 범죄의 전형으로 진정한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가위남’의 독특한 캐릭터 묘사는 ‘모방범 찾기’에 못잖게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아울러 수사팀 쪽 주인공인 신참 형사 이소베의 이야기 역시 다소 장황하게 그려지는데,
뭉뚱그려 정리하면 ‘어설픈 신참에서 진정한 형사로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범죄심리분석관 호리노우치와 노회한 능구렁이 같은 메구로니시 고참 형사들 틈바구니에서
이소베는 ‘직감과 증거’, ‘관찰의 힘’ 등 원론적인 것들을 차근차근 배워나갑니다.
물론 이소베가 어느 날 갑자기 진실 찾기의 주역으로 비약하는 허황된 전개는 없지만
시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설픈 신참의 성장 스토리는 분명 매력적인 설정이긴 한데
그걸 위해 ‘교과서적인 형사 입문 강의’가 지루함이 느껴질 만큼 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편에선 ‘가위남’이 살해된 유키코의 주변과 지인들을 탐문하면서 모방범을 찾아나서고
다른 한편에선 코끼리 다리 더듬듯 막연하고 무모한 수사팀의 행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 100여 페이지를 남기고 이 작품의 명성을 탄생시킨 엄청난 반전들이 공개됩니다.
가장 궁금했던 건 당연히 ‘가위남’과 ‘모방범’의 정체이니 반전 역시 이들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의 서평에서 “뭐가 뭔지 몰라 다시 앞의 내용을 봐야만 했다.”란 언급이 있을 정도로
독자의 예상과 추정을 뛰어넘는 짜릿한 반전인 건 분명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작가가 설치했던 반전의 재료들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태연스러운 것들이라
오히려 미리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작품의 명성에 비해 이 반전의 매력이 훅 느껴지지 않았는데,
정교하게 설계된 트릭 자체는 훌륭하고 빈틈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앞서 전개된 장황하고 상세한, 그래서 지루함마저 느끼게 한 미스터리 외적인 이야기들 탓에
정작 클라이맥스가 오기도 전에 미리 지쳐버렸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또, 반전의 순간에 “어? 이게 뭐지?”라는 모호함과 반감이 먼저 느껴진 것도 그렇고,
마지막까지 개운하게 정리되지 않은 몇몇 설정들(주로 ‘가위남’의 인격장애 관련) 역시
‘시원하게 뒤통수를 맞은 짜릿함’보다는 뭔가 찜찜한 느낌을 남기게 한 주범들이었는데,
그런 불편함 때문인지 굳이 앞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두 번째 읽기’에서 참맛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인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트릭에 하나하나 감탄하거나 놀라면서 행간의 매력까지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호기심이 생긴다면 꼭 한번은 다시 읽고 싶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