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나무 아래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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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두 번째 작품으로 모두 네 개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출간시기가 다른 단편들을 모아놓은 탓에 엄밀하게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라 할 순 없는데,

가령 표제작 백일홍 나무 아래는 전쟁에 징집됐다가 귀환한 긴다이치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그가 탐정으로 데뷔한 중편 혼진 살인사건의 바로 뒤를 잇는 작품이며,

향수 동반자살은 시대적 배경이 이누가미 일족이후로 꽤 한참 뒷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표제작 백일홍 나무 아래를 비롯한 초기의 명품들을 한데 모아놓은 단편집이라

일단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선정했습니다.

 

대부분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패전 이후 봉건 색채가 남아있는 지방을 무대로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호러에 가까운 기괴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이 작품의 수록작들은 대체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패전 이후의 혼란은 물론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인물들을 끌어들인 것은 여전해서

의족 신세가 된 귀환병(‘살인귀’, ‘백일홍 나무 아래’)이 등장하는가 하면

백화점과 화장품 회사 등 당시의 상류층의 일탈과 혼선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전쟁 중 부상으로 의족과 의안 신세가 된 채 나타난 전 남편으로 인해 공포에 빠진 여자와

희망 없는 세상에서 가불로 겨우 먹고 사는 한 추리소설가가 얽힌 이중살인극 (‘살인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백화점 귀금속 매장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여성의 기이한 절도행위와

그 행위 이면에 도사린 오래된 증오심이 낳은 불행한 살인극 (‘흑난초 아가씨’),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된 사건 현장을 뒤덮은 대량의 향수의 비밀과 함께

유명 화장품 회사 일족에게 닥친 얽히고설킨 비극을 그린 미스터리 (‘향수 동반자살’),

그리고, 9살 소녀를 돈으로 산 뒤 자신의 바람대로 사육한한 남자의 욕망이

끝내 소녀와 자신은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 파국으로 몰고 간 이야기 (‘백일홍 나무 아래’)

수록작 네 편 모두 제각기 독특한 살인사건과 미스터리를 품고 있습니다.

 

어느 작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코드는 욕망원한입니다.

두 가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들이긴 하지만

거기에 패전 후의 혼란과 전쟁으로 망가진 인물들이 끼어들면서 서사는 극적으로 확장됩니다.

똑같은 욕망과 원한이라 하더라도 그 배경에 직간접적으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 가미되면

단순한 범인 찾기 이상의 의미, 즉 사회파 미스터리의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배경이 명분 없는 미친 전쟁이 남긴 파탄과 혼란뿐이라면

개인의 욕망과 원한은 한없이 일그러지고 파괴적인 양상을 띨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네 편의 수록작 속의 살인범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욕망과 원한에 무기력하게 굴복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진실을 밝히는 임무를 맡은 긴다이치 코스케가 취한 객관적이면서도 조용한 관찰자적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무기력함을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만들곤 합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 해설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이 단편집 속 긴다이치 코스케의 사건 해결은 어쩐지 평소만큼 명쾌하고 시원스럽지 않다.

삶과 죽음의 무게에 잔뜩 눌려서일까, 사건을 해명하는 그의 어조에 깊은 슬픔이 깃들어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아쉬움을 느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동시에 미스터리가 풀린 걸 확인하고도 결코 개운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전체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 해설이기도 한데,

속 시원하고 명쾌한 미스터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 특별하면서도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가

실은 이 시리즈를 탐독하게 만드는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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