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어사이드 하우스
찰리 돈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월
평점 :
규율과 통제가 엄격한 웨스트몬트 기숙학교의 비밀동아리 ‘맨 인 더 미러’는
매년 하지와 동지에 폐 사택에서 섬뜩한 심령놀이를 통해 신입회원의 가입을 승인해왔습니다.
2019년 하지 늦은 밤, 그 심령놀이에 참가한 학생 일부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일찌감치 밝혀진 범인은 종적을 감췄다가 기차에 몸을 던졌고 그로 인해 사건은 종결됩니다.
하지만 1년 후, 당시 심령놀이에 참가했던 생존 학생들이 하나둘 자살하기 시작했고,
한 유명 앵커는 의문투성이인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팟캐스트로 인기를 끄는데 성공합니다.
그와 함께 자의 혹은 타의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인물들까지 진실 찾기에 나서면서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있던 사건의 이면이 한 조각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나는 동전 하나로 형을 죽였다. 간단하고도 가볍게, 그리고 완벽히 그럴듯하게.”
이 작품의 첫 문장으로, 누가 봐도 막판에 밝혀질 진범의 고백처럼 읽힙니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중간 짧은 챕터를 통해 이 ‘진범의 고백들’이 독자에게 소개됩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누구인지 불분명한 이 고백들은
한 소시오패스의 성장기이자 웨스트몬트高의 참극을 벌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데,
작가는 이 ‘진범의 고백들’과 함께 ‘2019년 사건 당시’, 그리고 ‘2020년 현재’ 등
세 가지 시점과 관점을 한 챕터씩 번갈아 독자에게 들려주며 미스터리를 전개시킵니다.
2019년 웨스트몬트高의 참극은 실은 각자의 사연을 갖고 각기 다른 곳에서 잉태된 비극들이
우연처럼, 또는 운명적으로 한꺼번에 조우하며 빚어낸 사건입니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복잡하게 구성돼있어서
독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여러 화자의 관점을 집중력을 갖고 들여다봐야만 합니다.
엄격한 통제와 규율에 지친 기숙학교 10대들의 비밀동아리에 대한 환상과 열망,
서양판 ‘분신사바’라 할 수 있는 심령게임 ‘맨 인 더 미러’를 통한 은밀한 가입절차,
그리고 그 게임에 끼어든 잔인한 살인마의 숨겨진 살의 등이 미스터리의 1차 재료들이지만,
사건 종결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연이어 자살을 택하는 당시 생존 학생들의 기이한 행태는
독자는 물론 뒤늦게 진실 찾기에 나선 주인공들에게도 혼란만 가중시키는 2차 재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심령게임이 벌어졌던 폐 사택 인근 선로에서 참혹한 죽음을 선택했지만
동기는 물론 “왜 하필 이제 와서?”라는 의문에 대해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몬트高에서 벌어진 참극의 진실 찾기에 나선 인물들은 꽤 많습니다.
1년 전부터 집요하게 자료를 모으고 블로그를 운영해온 기자 라이더 힐리어,
선정적인 팟캐스트를 통해 진실을 찾아내겠다고 나선 유명 앵커 맥 카터,
범죄심리학 교수이자 유명 프로파일러 레인 필립스와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
그리고 1년 전 수사를 담당했던 베테랑 형사 헨리 오트와
‘동전 하나로 형을 죽인 소년’ 사건을 맡았던 퇴직형사 거스 모렐리가 그들인데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맡은 역할을 통해 흩어진 미스터리의 조각들을 찾아냅니다.
그 가운데 프로파일러 레인 필립스의 연인인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가 돋보이는데
자폐증과 강박증에 대인기피증까지 있는 까다로운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 덕분에 경찰을 도와 미결 또는 난제 사건을 해결해온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능력 중엔 객관적인 단서와 자료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과 추리력 외에도
다소 심령적인 부분 – 희생자와의 교감? - 까지 언급돼서 잠시 “어라?”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로리 무어 & 레인 필립스’가 등장한 두 번째 작품인데
로리 무어의 특별한 능력은 아마도 전작에 좀더 상세히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복잡하고 묵직한 이야기들이 짧게 끊어진 챕터들 덕분에 더욱 속도감 있게 전개되지만
읽는 내내 아쉬움을 느끼게 한 대목이 두 가지 정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진실 찾기에 나선 인물들, 즉 ‘주인공’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각자 역할이 분담돼있긴 하지만 ‘따라가야 할 주인공’이 확실하지 않아 산만하게 읽혔고,
똑같은 단서를 놓고 번갈아가며 똑같은 고민을 하는 장면도 적지 않아서
때론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는 비중 면에서 그래도 ‘1순위 주인공’으로 보인 로리 무어의 역할인데,
그녀의 능력과 사연을 소개하기 위해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 것에 반해
정작 그녀가 얻어낸 성과들은 기대만큼 풍성하거나 특별하지 않았고,
그래서 앞서 장황하게 묘사된 그녀의 능력치가 별로 실감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별 한 개를 빼긴 했지만 어쨌든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인 건 사실입니다.
2018년에 데뷔한 뒤 3년 동안 5편의 작품을 낸 걸 보면 작가의 이력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한국에 처음 소개된 이 작품이 선전한다면 다른 작품들도 곧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