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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 라이어
태넌 존스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초반부 설정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갑자기 붐을 이룬 심리스릴러, 그중에서도 가족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작품들은
때론 연쇄살인마나 액션 히어로를 다룬 작품들보다 더 짜릿한 매력을 주기도 했지만
적잖은 비율로 지루함과 실망감만 안기기도 해서 가급적 외면하려 한 게 사실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나를 찾아줘’나 ‘걸 온 더 트레인’을 홍보카피에 끌어 쓰긴 했지만
완성도나 매력 면에서 ‘과장 광고’란 인상을 피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나 표지, 한 줄 카피에 혹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태넌 존스라는 낯선 작가의, 그것도 데뷔작인 ‘베터 라이어’는 그런 경위로 접한 작품입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레슬리는 10년 전 집을 나가 소식을 끊은 동생 로빈을 찾아 나서지만
그녀가 발견한 것은 살아 숨 쉬는 동생이 아닌 죽어 있는 시체였다.
아버지의 유언 탓에 동생이 있어야만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던 그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 지망생 메리에게 죽은 동생 로빈을 연기해줄 것을 제안한다.
메리는 로빈 몫의 유산을 주겠다는 레슬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집으로 따라간다.
겉보기엔 부유하고 평화로운 가정이지만 레슬리의 집을 떠도는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메리는
호기심을 넘어 불안한 기운의 이유와 그 안에 깃든 비밀이 뭔지 직접 알아내려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언뜻 보면 유산을 노리고 가짜 동생을 끌어들인 레슬리의 ‘유산상속 스릴러’인 것 같지만
예상 외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로빈 역할을 맡아 거액의 사례금만 챙기면 될 메리가
‘주제넘게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레슬리의 수상쩍은 비밀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됩니다.
레슬리의 집에 머물게 된 메리는 그녀가 자신에게 털어놓은 사정들이 모두 거짓말 같았고,
무엇보다 급히 상속받아야만 한다던 유산의 사용처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메리의 진실 찾기는 단순히 레슬리의 집 곳곳을 뒤지는데서 그치지 않고
마치 사립탐정이라도 된 양 거침없이 레슬리의 현재와 과거를 탐문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자 – 레슬리, 메리, 로빈은 각각
‘죽어야 하는 여인’과 ‘죽음을 연기하는 여인’, 그리고 ‘죽은 여인’으로 지칭됩니다.
모두 죽음과 관련 있는 캐릭터란 뜻인데 이 미스터리는 막판에야 독자들에게 공개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대부분 참혹한 비극의 산물로 밝혀지는데
작가는 막판까지 거듭된 반전을 통해 그 비극의 깊이와 무게를 더욱 묵직하게 빚어냅니다.
레슬리가 감추는 비밀들과 그것을 파헤치는 메리의 행적이 미스터리 코드를 담당하고 있다면
두 사람이 한 집에 머물며 발산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심리스릴러의 본색을 잘 드러냅니다.
거기에 이미 사망한 레슬리의 부모의 결코 평온하지 못했던 말년의 삶이 끼어들고
단란해 보이는 레슬리 가족에게서 풍기는 은밀하고도 수상쩍은 분위기까지 가세하면서
독자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이른 시간 안에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진실을 캐낼 수도 있지만
작가가 마련해놓은 마지막 장면까지 짐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100페이지쯤에서 한 번 포기하려 했고, 200페이지에서도 똑같은 고민을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 가족 중심의 심리스릴러가 대부분 그렇듯 – 느리고 지루한 전개였습니다.
레슬리가 메리를 동생 로빈의 대역으로 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지점까진 무척 빠르지만
그 뒤로 심리스릴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속도감은 느려지고 호흡은 마냥 길어집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막판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위해 필요한 포석인 건 이해하지만
느리고 지루한 심리스릴러에 대한 트라우마(?)를 일깨워 ‘포기’를 고민하게 한 것도 사실이라
어떻게든 완주해놓고도 “다시는 심리스릴러는...”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에게 소중하지 않은 문장이라곤 하나도 없겠지만 야박하고 이기적인 독자 입장에선
100페이지쯤 생략됐다면 속도감과 긴장감 가득한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정교한 미스터리 구성,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 매력적인 캐릭터, 거듭된 반전 등
데뷔작답지 않은 필력을 갖춘 작가라 후속작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후속작 역시 만연체의 심리스릴러라면 진지하게 고민할 게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몰입도 높은 작품에 만족하는 것은 물론,
후속작이 기대되는 신인작가의 탄생에 당연히 환호하고도 남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