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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벰버 로드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0년 1월
평점 :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다.
뉴올리언스 마피아 보스 카를로스의 심복인 프랭크 기드리는 등골이 서늘해진다.
자신이 맡았던 작은 심부름이 그 거대한 암살 음모의 일부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건 관련 인물들이 차례차례 제거되자 살아남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도망치던 기드리는
두 딸과 함께 무책임한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에게서 도망쳐 LA로 향하던 샬럿과 마주친다.
기드리는 조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단란한 가족으로의 위장이 필요했고
차 고장으로 곤경에 처한 샬럿은 하루 빨리 LA에 도착하기 위해 기드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조직 최고의 암살자 폴 바로네가 무자비한 살인극을 벌이며 기드리를 바짝 추격해오는 가운데
우연과 운명 덕분에 함께 하게 된 여정의 끝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2019년에 읽은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루 버니의 작품입니다.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은 오클라호마시티를 무대로
26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사건의 진실을 쫓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였는데
각각 참혹한 기억과 깊은 상심을 지닌 주인공들이 집요하게 진실 찾기에 나선 이야기라
무척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노벰버 로드’는 1963년 11월을 배경으로 한 로드 스릴러입니다.
목숨을 걸고, 또는 인생을 걸고 도망치면서도 애정, 온기, 추억들을 쌓아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을 쫓는 피도 눈물도 없는 추격자라는 설정 때문에
읽는 내내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몸담았던 조직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살아남기 위해 과거와 단절하려는 기드리에게도,
꿈도 희망도 없는 소도시와 무책임한 남편이 지배하던 과거와 단절하려는 샬롯에게도
이 무모한 여정 끝에 딱히 믿고 의지할 사람이나 ‘약속의 땅’ 같은 게 있는 건 아닙니다.
막연한 기대와 바람만 갖고 각각 라스베이거스와 LA로 달려가긴 해도
그곳에는 비참한 죽음 또는 냉랭한 문전박대가 기다릴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노벰버 로드’를 달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지우고 싶은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함께 보낸 1주일의 시간은 어쩌면 그들에겐 평생 가장한 행복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뉴올리언스의 환락과 폭력 속에서 살아온 기드리가 누군가를 간절히 지키고 싶어진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나온 샬롯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온기를 느끼며 희망을 가진 것도
이전의 과거 속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면서도
기드리와 샬롯이 달콤한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를 바란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을 소재로 한 스릴러 중 기억나는 건 스티븐 킹의 ‘11/22/63’인데
시간여행을 동원한 기발한 발상은 놀라웠어도 이야기 자체는 다소 밋밋했던 반면,
‘노벰버 로드’는 팩트에 기반한 픽션이지만 좀더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설정을 지녔습니다.
대통령 암살을 도모한 마피아가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연루된 측근들을 제거한다는 구상은
케네디 암살을 소재로 활용한 그 어떤 작품들보다 신선한 아이디어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꿈과 희망을 위해 무모한 ‘가출’을 감행한 샬롯과 그녀의 딸들이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단순한 액션 로드 스릴러를 넘어 휴먼드라마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습니다.
뉴올리언스 마피아 중간보스 기드리의 캐릭터 때문인지
작가가 문장에 멋도 많이 부리고 기교도 많이 부린 느낌이었는데
영화 ‘대부’를 보듯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다소 어렵게 읽힐 때도 있었습니다.
뭐랄까, 과도한 생략과 멋부림이 물 흐르듯 이어져야 할 책읽기를 살짝 방해한 느낌이랄까요?
또, 기드리와 샬롯이 감정을 쌓아가는 시퀀스가 생각보다 좀 길게 묘사된 점이라든가
그들을 추격하는 암살자의 행보가 예상보다 처져 보인 점 등이 아쉬웠는데,
이런 점들 때문에 별 하나를 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당초 초고가 “전작의 성공을 의식한 듯 너무나 대중적인 공식을 따르는 스릴러”가 된 탓에
작가가 기본 설정만 남겨두고 1년에 걸쳐 거의 새로 썼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봤는데,
그 초고가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제 취향에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해봤습니다.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이나 ‘노벰버 로드’ 모두 2%가 조금 넘는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앞으로도 루 버니의 신작 소식에는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