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독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사미 마코토는 일본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20년에만 두 편의 작품이 출간되어 조금씩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작가입니다.

우사미 마코토와 처음 만난 작품인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현대문학)

호러, 기담,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포진된 (연작 성격의) 단편집입니다.

끈적함과 서늘함, 안쓰러움과 공포심이 묘하게 뒤섞인 10편의 단편들은 무척 매력적이었는데

덕분에 후속작, 그것도 그녀의 장편을 꼭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막바지에 드디어 어리석은 자의 독을 만나게 됐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50년에 걸친 시간적 배경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세 남녀의 기구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인생 전반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1965~66, 1985~86, 2015~2016년 등 세 시기가 배경인데,

현재 시점엔 고급 요양원에 몸을 의탁한 한 할머니가 과거를 되짚는 이야기가 담겨있고,

80년대는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 30대 여성 요코와 기미의 인연과 함께

그녀들 사이에 낀 한 남자 유키오까지 포함된 세 남녀의 파국과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60년대는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탄광촌을 무대로 절망에 빠진 여중생 기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친구 유키오와 함께 생의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인물이나 사건 소개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아 자세한 언급은 하기 힘들지만,

띠지에 적힌 문구인 그 순간 우리는 공범이 되었다.”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작품의 출발점은 시대의 어둠과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 살인을 저지른 자들,

그래서 평생 그 죄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절망입니다.

이후 50년에 걸친 공범들의 악몽 같은 삶이 그려지고

그들의 삶에 끼어든 또 다른 의미의 공범들의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가 그려진다는 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소개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읽는 동안 여러 번 반복되어 눈길을 끄는 인상적인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인생은 죽기 전에 다 수지타산이 맞춰지게 돼있다.”인데,

말하자면, 죄를 지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헤어지고 싶어도 헤어지지 못하고 오랜 시간 서로의 죄를 보듬으며 살아온 기미와 유키오,

죽은 언니가 남긴 정신지체아 조카 다쓰야를 키우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에 몸서리치는 요코,

오랜 시간 기미와 유키오 주위를 맴돌며 악의 화신처럼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온 남자,

그리고 그 외에도 이들 주위를 맴돌았던 꽤 많은 인물들까지

대부분 바로 이 인생의 수지타산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거기다 시대의 풍파, 죄와 업보, 비극과 운명이라는 불길한 기운의 재료들까지 곁들여져서

읽는 내내 가슴 한쪽에 큰 돌덩어리를 얹어놓은 듯한 무거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설정 때문인지 수시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떠오르곤 했는데,

이야기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한순간 인생의 방향이 최악으로 틀어져버린 주인공들을

애증 섞인 고통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쉽게 잊히지 않을 깊은 여운을 각인시킨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막장의 끝이란 소릴 듣기에 딱 알맞긴 하지만

활자로 만난 50년에 걸친 비극은 막장과는 거리가 먼 비애감을 깊이 심어줍니다.

,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임에도 진범 찾기가 목적인 정통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시대의 풍파에 휩쓸린 인간의 절망과 내면을 담아낸 작품이라는 비평에 관심이 끌린다면

어리석은 자의 독과 꼭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