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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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나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

츠지무라 미즈키의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등 재미있게 읽은 작품들이 꽤 있긴 해도

역시 10대 중고생들이 주조연을 도맡은 미스터리는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제 취향과 거리가 먼 초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탓에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본격미스터리대상일본추리작가협회상후보작이라는 카피에 이끌려 읽게 된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100페이지 정도만 읽고 중간에 포기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열었는데,

의외로 눈길을 끄는 이야기에 금세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했습니다.

 

한 고등학교에서 3명의 학생이 연이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충격에 빠져 등교 거부 중인 미즈키를 찾아갔던 가키우치는 놀란 만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미즈키에 따르면 3명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며 범인은 정체불명의 사신(死神)으로,

그가 3명의 정신을 조종하여 자살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미즈키의 말에 혼란을 겪던 가키우치는

누군가가 보내온 황당무계한 편지를 받곤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 학교에는 대대로 4명의 초능력자, 일명 수취인이 존재하는데,

선대 수취인이 죽은 탓에 무작위로 뽑힌 가키우치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생긴 초능력을 확인한 가키우치는 미즈키의 말에 다시 귀 기울이는 한편

3명의 친구들을 살해한 사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다른 수취인들과 연대하기로 결심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주인공이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학교 문제를 내포한 듯한 제목과 청춘물 느낌의 표지에서 추정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미스터리뿐 아니라 성장, 청춘, 학교, 사회 등 다양한 코드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사신의 정체를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이 초능력+본격 미스터리의 콜라보라면

사건의 이면이 드러나는 후반부에는 비단 10대에만 국한되지 않는 꽤 거대한 담론,

즉 개인과 사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학교와 사회에 만연한 계급론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능력과 본격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중후반부까지는 꽤 흥미진진하게 읽히는데다

일찌감치 정체가 드러난 사신과 초능력자들의 두뇌싸움 역시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어서

저처럼 의구심을 갖고 첫 장을 연 독자라도 끝까지 달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초반에 떨쳐내기 힘들었던 초능력에 대한 위화감도 금세 옅어지는 걸 느꼈는데

아무래도 능수능란하게 캐릭터와 스토리를 설계한 작가의 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만, 작가의 의도, 즉 주제에 대해 강의에 가깝게 설파되는 막판 엔딩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호불호가 꽤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사신이 참극을 일으킨 계기와 동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은 물론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억지 또는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과연 살인을 야기할 만한 문제였던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사쿠라 아키나리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인데

일본 출간작들의 제목만 봐도 무척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인상입니다.

(‘느와르 레버넌트’, ‘실연을 각오한 라운드어바웃’, ‘아홉 번째 열여덟 살을 맞이한 너와)

이 작품에서 큰 복선이나 충격적인 반전을 맛보진 못했지만

복선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은 걸 보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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