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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를 다시 만난다
나카타 에이이치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1999년, 야구 시합 도중 머리에 공을 맞고 정신을 잃은 11살 가바타 렌지.
하지만 그가 병원에서 깨어난 건 무려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2019년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31살 어른의 몸이란 걸 확인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약혼자라 자칭하며 그 앞에 나타난 니시조노 코하루는 더더욱 놀라운 말을 합니다.
11살의 가바타 렌지의 의식이 20년이 지난 31살 가바타 렌지의 몸에 들어왔듯
31살 가바타 렌지의 의식은 20년 전인 11살 가바타 렌지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는 것.
충격적인 건, 과거로 간 31살 가바타 렌지는 그 당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을 저지하거나
저지하진 못하더라도 진범의 정체를 알아내려 한다는 점입니다.
제목, 표지, 북트레일러 모두 다분히 라노벨 느낌이라 관심 밖의 작품으로 제쳐놓았지만
분명 낯익은 작가의 이름 때문에 출판사 소개글을 살피다가 그 낯익음의 이유를 알게 되곤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독서목록에 포함시킨 작품입니다.
그의 이름이 낯익었던 건 ‘메리 수를 죽이고’의 네 명의 필진 중 하나였기 때문인데,
나머지 세 명의 필진은 오츠이치, 야마시로 아사코, 에치젠 마타로입니다.
그리고 이 네 명은 실은 모두 같은 인물, 즉 오츠이치의 ‘분신’들입니다.
오츠이치가 호러 미스터리에 주력한 필명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는 괴담소설을, 나카타 에이이치는 연애소설을 위한 필명입니다.
취향과 거리가 좀 먼 SF 타임리프물이지만 미스터리 구도도 흥미로워 보이고
오츠이치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첫 장을 펼쳤고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반에는 살짝 고전했던 게 사실입니다.
우선, 의식이 바뀐 두 명의 가바타 렌지 중 한 명이 너무 어린 11살로 설정된 탓인지
예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청소년소설처럼) 가볍게 읽힌 점이 가장 큰 이유였고,
타임리프의 ‘작동 원리’가 다소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진 게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작가는 여러 번에 걸쳐 ‘어린 렌지’와 ‘어른 렌지’의 의식 교환 전반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걸 제대로 이해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씩 이해하는 과정 역시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어른의 몸에 들어온 ‘어린 렌지’는 만 하루 동안 많은 일을 겪습니다.
약혼녀 코하루로부터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31살에 이르렀는지 알게 된 렌지는
다시 11살로 돌아가더라도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지만
동시에 11살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 때문에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일가족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야 하고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코하루를 구제하여 그녀의 연인이 돼야 한다는 사실은
그에겐 두려움이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11살의 ‘어린 렌지’ 몸에 들어가 일가족 살인사건 당일을 맞이한 ‘어른 렌지’는
어떻게든 살인사건을 저지하거나 진범의 정체라도 파악하려 분투합니다.
그 진실을 기억한 채 31살 몸으로 돌아가면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어린 렌지’가 겪을 시련과 혼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11살의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메모와 녹음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이미 일어난 과거는 바꿀 수 없는가?’라는 화두였는데,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그럴 경우 현재의 상황들이 모두 소멸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어린 렌지’의 처지는
타임리프 스토리의 전형적인 상황이긴 해도 마지막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미스터리 자체는 어지간한 독자라면 그 진상을 일찌감치 파악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방에 뿌려진 크고 작은 단서들이 막판에 이르러 깔끔하게 회수되는 걸 보면서
오츠이치의 정교한 설계에 여러 번 놀라곤 했습니다.
또 역자 겸 편집자가 언급했듯 렌지와 코하루의 잔잔한 멜로 감성도 재미있게 읽혔는데,
아마 이런 설정 때문에 이 작품이 나카타 에이이치의 필명으로 발표된 것으로 보입니다.
초반의 가벼움만 잘 극복한다면, 그리고 다소 복잡한 타임리프의 원리만 이해한다면
뒤로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 작품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애초 영화 시나리오로 시작됐다가 제작이 무산되면서 소설로 전환됐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무척 흥미진진한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 덕분에 나카타 에이이치 필명으로 ‘나는 존재가 공기’(2019)가 출간된 걸 알게 됐는데
오츠이치의 팬인 이상 그 작품도 놓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가벼운 연애소설’이라면 좀 고민이 되겠지만 일단 기대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