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
사쿠라기 시노 지음, 박현미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 미스터리 작가 중 개인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입니다.

새해(2021) 들자마자 신작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그동안 아끼고 아끼느라 안 읽고 모셔뒀던(?) 그녀의 작품 두 편을 연이어 읽기로 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책 정보에는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2013년에 출간된 걸로 소개돼있지만

실은 2009년에 발표된 단편집 恋肌과 수록작이 거의 비슷합니다. (두 편 외에 동일)

책 출간을 통한 공식 데뷔가 2007년의 빙평선인 점을 감안하면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은 사쿠라기 시노의 초기작이라고 봐도 무방한 작품입니다.

 

270여 페이지의 분량에 7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대략 4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장편에 못지않습니다.

신작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을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 7편 중 5편을 읽었으니

어느 정도 사쿠라기 월드에 익숙해졌을 만도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작품은 가슴을 찌르는 통증과 처연한 여운을 첫 경험마냥 강렬히 각인시켰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의 주인공은 훗카이도에 살거나 그곳과 인연을 맺은 여자들입니다.

또 대부분 잘 해야 평균, 아니면 그 이하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여기서 평균이란 때론 지극히 현실적인 처지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기도 하고,

때론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상태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쿠라기 시노의 여자들은 무척 강합니다.

그리고 그 강함의 가장 큰 원천은 그녀 이야기의 주된 공간적 배경인 훗카이도,

그중에서도 쇠락한 항구도시이자 여름엔 안개로, 겨울엔 추위로 둘러싸인 구시로입니다.

 

바다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가오는 해무 때문에 도시 전체가 갯내에 휘감겨 있었다.”

그녀의 단편집 빙평선에서 숨 막힐 듯한 구시로의 여름을 압축적으로 묘사한 문장입니다.

그에 반해 겨울의 구시로는 바람과 동토가 전부인 황무지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더는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는 쇠락한 항구도시의 여름과 겨울은

설령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칩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여자들은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름 잘 견뎌내고 잘 버텨냅니다.

때론 내일이란 게 없는 것처럼 자신을 놓아버린 인물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엔딩은 대체로 강하다는 인상을 깊게 심어주곤 합니다.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시집온 뒤로 말문을 닫아버렸지만 자신만의 심지를 놓치지 않는 호아하이,

무능한 기둥서방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도 결국 사소한 호의에 무너지는 치즈루,

스트립쇼 댄서지만 자신의 춤에 긍지를 갖고 있으며 거리낌없이 새 출발을 감행하는 시오리,

실직한 남편 때문에 천직을 버렸지만 끝내 자신의 길을 되찾는 나나코 등

암담하거나 상심 가득한 상황 속에서도 끝내 자기를 잃지 않는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강한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이 쇠락의 부정적 기운을 고스란히 받은 것처럼 묘사되는데

무능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여자들에게 그 약점들을 숨기느라 포악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울과 말빨만 좋은 기자였지만 결국 기둥서방을 자처한 야비한 남자,

기둥서방도 모자라 살인을 저지르고도 모든 것을 여자에게 의지하는 남자,

실직 후 열패감과 열등감에 몰린 나머지 생계를 맡은 아내를 증오하는 남편이 그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을 여성 편향적이라고 오해해선 안 되는데

나름 견고한 애정을 간직하거나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는 건실한남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쿠라기 시노의 소설을 관능적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거의 매 작품마다 남녀가 몸을 섞는 장면이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성애(性愛)라기보다는 고통스럽거나 건조하거나 무의미한 분위기를 띠곤 합니다.

이 작품 속의 섹스 역시 몸을 섞는다기보다 사포로 문지르듯 상처만 남는 경우가 많은데,

상대를 완전히 잡아먹거나 반대로 상대에게 완전히 잡아먹혀야만

비로소 쾌감이든 자괴감이든, 만족감이든 열패감이든 느낄 수 있다는,

위태롭고 무모한 확신에 빠진 남녀들의 자학에 가까운 몸짓이 대부분입니다.

결코 관능적일 수 없는, 오히려 인물들의 심연을 민낯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라고 할까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은 딱히 출간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단편집이나 연작집이 많은 탓도 있지만

어느 작품을 먼저 읽든 나중에 읽든 일관성 있는 정서와 분위기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나오키상 수상작인 호텔 로열을 통해 사쿠라기 시노를 알게 됐고

그 뒤로 정신없이 사쿠라기 월드에 빠져들었는데,

혹시 이 작품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면 호텔 로열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곧 출간될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은 제목부터 따뜻함과 훈훈함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왠지 사쿠라기 시노 스타일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작품인데

아무래도 그녀 고유의 정서가 배제됐을 리는 없을 테니 오히려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직 안 읽은 순수의 영역을 읽으며 그녀의 신작이 배송되기를 기다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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