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살의 - JM북스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손지상 옮김 / 제우미디어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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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출간된 성모를 통해 팬이 된 이후 절대정의’, ‘작열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 유리의 살의입니다.

아쉽게도 성모이후 그에 맞먹는 만족감을 느낀 적이 없던 터라

눈길을 확 잡아 끈 다소 원색적인 제목과 표지에 나름 기대감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카시하라 마유코라는 여자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며 스스로 경찰에 신고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20년 전의 사고로 고차뇌기능장해라는 기억장애를 앓아오던 중이었고

기억 자체가 10~20분마다 새로 세팅되는 심각한 증상을 가진 환자입니다.

그런 탓에 살인을 저지른 일과 신고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41세의 자신을 20대라고 착각하는 등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기억의 오류를 드러냅니다.

사건을 맡은 형사 키리타니와 노무라는 그런 마유코로 인해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정황이 워낙 확실한 탓에 대략의 보충조사를 통해 사건을 종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의외의 변수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수사는 혼란에 빠지고

키리타니는 마유코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을 갖고 전면 재수사에 나섭니다.

 

기억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들이 꽤 많은 편이지만

아키요시 리카코는 수시로 기억이 사라지는 살인고백자를 통해 차별화된 이야기를 펼칩니다.

10~20분마다 기억이 새롭게 세팅되는 마유코의 살인고백은 무척 흥미로운 설정인데,

그 고백을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진술 도중 수시로 여기가 어디죠?”, “제가 사람을 죽였다고요?”라는 말을 남발하는 바람에

사건을 맡은 키리타니와 노무라 입장에선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유코 주변 인물들의 수상쩍은 행태와 의외의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고백과 진술은 그야말로 설득력 하나 없는 허상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마유코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며 신고한 살인사건이

그녀의 기억장애를 야기한 20년 전 묻지마 살인과 연관된 탓에

이야기는 한층 더 복잡해지고 살인사건의 진상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기만 합니다.

 

등장인물이 별로 없어서 읽는 동안 범인의 정체와 동기를 특정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지만

아키요시 리카코는 특유의 반전 솜씨를 발휘하여 이리저리 이야기를 비틀고 또 비튼 끝에

사건 관련자들의 씁쓸하거나 참혹한 사연들을 공개하면서 숨 가쁜 엔딩을 이끌어냅니다.

도중에 범인이 눈에 보이더라도 남은 이야기들을 쉽게 짐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미스터리의 고수들에겐 다소 상투적인 엔딩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팬으로서의 사감 때문인진 몰라도 마지막 장까지 무척 흥미롭게 책장을 넘긴 게 사실입니다.

 

출판사가 인터넷 서점에 짧고 인색한 소개글만 남겨놓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아키요시 리카코의 주 특기인 연이은 반전때문에 무엇 하나 소개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다 읽고 보니) 등장인물 소개조차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소개하지 않고 서평을 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해 두루뭉술한 독후감만 적어봤습니다.

 

기대와 달리 이번에도 성모만큼의 만족감을 얻진 못했지만

흥미유발자이자 기막힌 이야기꾼 아키요시 리카코의 매력은 충분히 맛봤다는 생각입니다.

라노벨로 분류되는 암흑소녀외에는 모두 읽은 셈인데

2021년에도 아키요시 리카코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해봅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한국에서 출판된 작품마다 출판사와 번역자가 모두 달랐는데

작품 쟁탈전(?) 같은 불상사 때문에 그녀의 신작 소식이 요원해지지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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