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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도시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멀홀랜드 댐 위에서 처형당하듯 살해당한 남자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미해결 사건 전담반에서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으로 자리를 옮긴 해리 보슈가 출동하지만
현장에서 한때 열정에 빠졌던 상대인 FBI요원 레이철 월링과 마주치곤 깜짝 놀랍니다.
레이철은 희생자가 방사능물질 접근권한을 가진 의학 물리학자이며
그 때문에 이 사건이 테러와 연관됐을 수 있기에 자신이 출동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대량의 세슘이 사라진 게 드러나자 FBI뿐 아니라 연방기관 전체에 비상이 걸립니다.
FBI는 국가안보를 내세우며 사건을 독점하려 하지만
보슈는 살인 현장과 희생자의 집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시리즈 전작들과 비교하여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너무 슬림해진 책의 두께입니다.
보너스로 실린 에필로그까지 포함해도 마지막 장이 276페이지에서 마무리되는데,
보통 500페이지 안팎이던 전작들에 비하면 2/3 또는 절반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입니다.
사건 역시 발생부터 종결까지 채 12시간이 안 걸리는 것으로 설정돼있는데,
이런 분량과 속도감은 애초 이 작품이 신문 주말판에 연재됐던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작인 ‘에코 파크’에서 극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고도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던 보슈는
결국 몇 개월의 정직 끝에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다행히 보슈에게 호의적인 국장 덕분에 더 큰 시련을 겪진 않은 걸로 보입니다.
56살 보슈의 새 파트너는 그보다 스무살 이상 어린 쿠바계 신참 이그나시오 페라스입니다.
아직 때 묻지 않은 경력 탓에 그는 보슈의 ‘폭주’에 여러 번 놀라곤 하는데
특히 경찰조직과 FBI에 정면으로 맞서는 보슈 때문에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한편 보슈의 숙적인 전직 부국장 어빙은 시의원이 되어 보슈와 LA경찰국과 각을 세우는데
그의 야욕과 악행이 언제쯤 보슈에게 응징당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정열적인 만남과 씁쓸한 이별을 반복해온 레이철 월링과의 재회가 가장 반가웠는데
‘에코 파크’ 이후 보슈를 떠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한 레이철이었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또 다시 같은 사건에서 보슈와 마주치면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게 됩니다.
새로운 부서에서 새로운 파트너와 새 출발을 하게 된 보슈가 마주한 사건은 꽤 심각합니다.
방사능물질이 사라지고 테러의 위협이 대두되면서 살인사건은 하찮은 취급을 받게 되는데
그로 인해 보슈는 수사 시작과 동시에 사건에서 내쳐질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사실, 국가안보가 대두되고 테러의 기운이 감도는 사건을 놓고
‘일개 형사’가 살인 자체에만 신경 쓰는 건 상식적이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보슈로서는 테러와는 무관한 뭔가 수상쩍은 것들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 탓에
레이철은 물론 국장과 새 파트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수사를 고집합니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보슈의 ‘똘끼’는 충만합니다.
레이철과의 재회는 계속 궁금증을 일으키고, 새 파트너와의 삐걱거림 역시 흥미롭습니다.
사건 역시 “정말 보슈가 테러리스트와 한판 붙나?”라는 의문을 놓을 수 없게끔 만들어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막판에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마냥 궁금해질 뿐입니다.
다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알찬 뼈대만 읽는 것 같은 건조함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신문 구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는 연재물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겠지만
‘고독한 코요테’ 같은 보슈의 고뇌나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 같은 ‘사족’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오로지 당면한 사건 해결을 위한 돌직구 스타일의 전개에만 충실했다는 뜻입니다.
재미 면에선 뛰어났지만 기름기 없는 닭가슴살처럼 퍽퍽한 느낌만 강했다고 할까요?
이후 마이클 코넬리는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의 두 번째 이야기인 ‘허수아비’를 거쳐
홍콩을 무대로 해리 보슈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찍을 ‘나인 드래곤’을 집필합니다.
시리즈 4편인 ‘라스트 코요테’가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면
14편인 ‘나인 드래곤’은 보슈의 또 다른 가족들에 관한 깊은 비극을 그린 작품인데,
그래서인지 시리즈에 큰 획을 긋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허수아비’로 잠시 숨을 돌리면서 ‘나인 드래곤’과 다시 만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