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해둔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을 큰맘 먹고 꺼내들었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을 큰맘 먹고읽는다는 것 자체가 뜬금없는 소리인 건 분명하지만

사신 치바그래스호퍼이후로 절망(?)하거나 중도 포기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던 탓에

이 사람은 나하곤 안 맞는구나.”라는 생각에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올해 출간됐지만 아직 못 읽은 작품들을 허겁지겁 읽다가 예기치 않게 잠시 짬이 난 덕분에

어찌어찌 책장을 뒤적거렸는데 하필 눈에 밟힌 게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선문답이나 화두를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분명히 등장인물이 있고, 줄거리도 있고, 엔딩도 있지만 무엇 하나 선명하게 남은 것 없이

내가 지금 뭘 읽은 건가?”라는, 스스로 위축감이 드는 자문만 잔뜩 남았습니다.

 

무능한 정치판에 대한 혐오,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에 대한 비굴한 열패감,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청춘과 비겁한 기성세대만 존재하는 암담한 현실 등

그야말로 정체된 채 미래라곤 보이지 않는 일본의 현실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깔립니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주인공 안도와 준야, 두 형제는 각기 다른 초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형 안도는 상대방의 입에서 자신이 의도하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복화술의 능력을,

동생 준야는 가위바위보든 경마든 1/10 확률 안에선 절대 지지 않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매사에 생각이 너무 많아 고찰마라는 별명까지 얻은 안도는

최근 정치판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파시즘 경향에 공포를 느낍니다.

특히 급진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정치인 이누카이는

안도에겐 경계해야 할 파시즘의 화신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저지해야 할 대상입니다.

 

자신의 초능력으로 이누카이의 폭주를 막아보려던 안도가 급작스럽게 사망한지 5년 후.

형 안도와 달리 생각이나 사색보다는 직감과 감성에 의존하던 준야는

어느 날 자신이 1/10 확률 안에선 절대 지지 않는 초능력을 갖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총리가 된 이누카이가 자위대의 무력 보유를 포함한 개헌을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준야는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나름의 싸움을 준비하기로 결심합니다.

 

정리 자체가 어려운 내용이라 줄거리가 주절주절 한없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문제는 실제 내용은 (위의 줄거리와 달리) 초능력 형제의 파시즘 투쟁 이야기도 아니고

(어떤 형태가 됐든) 정치나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와는 무관한 소소한 일상들이나 신기한 초능력 해프닝이 더 눈에 띄고

가끔은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툭툭 튀어나와 책읽기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오죽하면 조연이든, 소품이든, 단순 해프닝이든 뭐라도 사소한 게 등장하기만 하면

주제를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게 아닐까 싶어 잔뜩 노려보기도 했지만

결국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형 안도는 엉터리라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을 믿고 대결한다면 세상은 바뀐다.”라며

자신의 소신과 함께 파시즘에 대한 공포나 반감이라도 드러내지만,

동생 준야는 도무지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고

내재된 꿈이나 희망, 목표가 뭔지도 통 알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누구라도 이 작품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를 바라면서

출판사의 소개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두루 훑어봤지만

역시 알 수 없다.”는 제 나름의 결론을 바꿀 만큼 특별한 정보를 얻진 못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라는 설명도,

황야일지 푸른 하늘일지 모르는 미래를 꿈꾼다는 엔딩 부근의 묘사도,

결국 마왕은 이누카이일까, 군중일까, 아니면 안도나 준야 자신일까?”라는 소개글도

어느 하나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언급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다.”는 작가의 변(),

이사카 고타로의 최고의 소설로 평가했다는 문학평론가들과 편집자들의 호평도

이해력 부족한 독자에겐 전부 궤변으로만 들린 게 사실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돼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읽게 된다면

어쩌면 지금의 이 무지몽매함과 몰이해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이사카 고타로에게 연타로 좌절당한 걸 생각하면 그럴 여지는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