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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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마요는 황망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평범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삽시간에 주민들의 일상을 잠식한다. 존경받는 교사였던 아버지의 죽음은 마요로 하여금 아버지의 제자이자 자신의 동창생인 중학교 친구들을 용의자로 주시하게끔 만든다. 게다가 마술사로 미국에서 활동하느라 10년간 연락이 끊겼던 삼촌 다케시가 갑자기 나타나 경찰과 별도로 독자적인 조사를 제안하자 마요는 당황한다. 태어난 뒤 단 두 번밖에 본 적 없는 데다 어딘가 4차원 괴짜 같은 삼촌이 영 미덥지 않지만 발군의 추리력과 능란한 화술, 그리고 마술사다운 신비한 능력을 직접 목격한 마요는 결국 그와 함께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직 마술사이자 뛰어난 추리력과 사기꾼 같은 화술을 지닌 블랙 쇼맨다케시는 여느 괴짜 탐정을 능가하는 희한한 캐릭터입니다. 어려서부터 초능력에 관심을 가진 끝에 미국으로 가 사무라이 젠이라는 유명 마술사가 됐고, 적어도 두세 수를 내다보는 뛰어난 추리력과 상상력을 지녔으며 아무 것도 모르면서 화술 하나만으로 상대의 비밀과 이력을 캐내는 사기꾼 같은 기질도 있고, 심지어 거리낌 없이 도청, 속임수, 위증 등 불법적인 수단으로 경찰을 바보로 만들어가면서 마요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형님인 에이치의 죽음을 단독 조사하는 무모함도 지닌 인물입니다. 재미있는 건 아무도 못 말리는 그의 빈대(?) 캐릭터인데, 상대가 조카든 경찰이든 안면몰수하고 밥값에 커피값까지 덤터기씌우려는 그의 뻔뻔함은 히가시노 특유의 코믹 코드를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자 다케시의 조카인 마요 입장에선 이런 사악한 삼촌이 마음에 들 리 없지만 무능하고 열의 없어 보이는 경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뜬금없고 맥락 없어 보이던 다케시의 조사가 논리정연하게 정리되는 걸 지켜보면서 마요는 점차 다케시의 괴짜 탐정 노릇에 녹아들게 되고 동시에 유력한 용의자인 자신의 동창생들을 다케시 못잖게 예의주시하기 시작합니다.

 

존경받던 교사의 의문의 죽음, 그를 만났거나 만날 계획이 있던 동창생들의 수상쩍은 행태들, 그리고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지만 동시에 위화감으로 가득한 살인사건 현장 등 이 작품 속의 미스터리는 다소 쉬워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구도를 띠고 있습니다. 모두가 범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모두가 범인일 리 없는 애매모호한 정황 속에서 좌충우돌 콤비 캐릭터인 삼촌 다케시와 조카 마요는 경찰을 능가하는 맹활약을 펼칩니다.

 

작품 속 배경인 마요의 고향은 코로나의 충격으로 극심한 침체를 겪는 중으로 설정됐습니다. (코로나 이후 구상된 작품인지, 구상 중인 이야기에 코로나를 끼워넣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코로나가 창궐한지 만 1년이 안된 걸 감안하면 엄청난 순발력으로 집필된 걸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550여 페이지의 분량을 생산한 걸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공장장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스터리의 규모나 깊이로 볼 때 다소 과도한 분량으로 보인 게 사실이고, 다케시와 마요의 분투는 매력적이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아서 앞서 전개된 꽤 많은 분량의 이야기들이 조금은 허전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소한 점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면, 살인범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에서 아침저녁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삼촌 다케시와 투닥거리는 마요의 모습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살짝 불편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피살자가 아버지가 아니라 각별한 중학교 은사 정도였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블랙 쇼맨다케시의 캐릭터가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앞으로 블랙 쇼맨 시리즈가 이어질 예정이라 그런지 다케시의 모든 전사(前史)가 이 작품에서 소개되진 않아서 아직 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잔뜩 남아있는 게 사실입니다. 다케시의 조카인 마요가 앞으로도 계속 콤비 주인공으로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괴짜 탐정 다케시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한 편의 우당탕탕 마술쇼를 본 듯한 책읽기였는데 만일 후속작이 나온다면 다케시의 또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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