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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김현화 옮김 / 마시멜로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2017년 최고의 미스터리 중 한 편이었던 ‘성모’의 작가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입니다.
2018년 ‘절대정의’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게 된 아키요시 리카코인데,
아무래도 ‘성모’에서의 첫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기대감이 한껏 오른 게 사실이고,
‘절대정의’가 살짝 기대에는 못 미쳤어도 여전히 후속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터라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 어떤 반전을 들고 독자를 찾았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띠지에 적힌 “남편의 복수를 위해 얼굴을 고치고 살인자의 아내가 되었다!”라는 카피대로,
남편 다다토키를 살해한 것이 분명한 의사 히데오에게 접근해 그의 아내가 된 사키코가
살인동기와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위장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사키코에게 있어 죽은 남편 다다토키는 삶의 전부이자 이정표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부모를 잃고 엉망진창의 삶을 살아온 공통점 때문에 연민과 사랑을 느꼈고,
결혼한 뒤에는 두 사람 모두 소박한 행복을 꿈꾸며 안온한 날들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다토키는 사고인지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유력한 용의자였던 히데오는 우여곡절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격분한 사키코는 새로운 신분과 얼굴로 히데오에게 접근해 그의 아내가 됐고,
남편을 죽인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그를 위해 헌신적인 주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소름 끼치는 일이긴 해도 밤마다 몸을 섞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히데오가 살인자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그의 주변을 샅샅이 조사합니다.
사키코의 위장결혼은 ‘작열하듯 타오르는 복수심’ 외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고행입니다.
하지만 죽은 남편 다다토키와 히데오의 관계를 파헤치고 살인동기와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히데오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들여다봐야만 하는 사키코로서는
부부가 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선택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 고행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키코를 숨 막히게 만든 한여름의 햇빛과 그녀의 복수심을 상징하는 ‘작열’이라는 제목은
읽는 내내 심연을 향해 폭주하는 사키코의 고행을 한층 더 절절하게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점차 미스터리를 벗어나 사키코의 심리가 ‘변질’되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나는 지옥에 있는 걸까, 천국에 있는 걸까?”라는 띠지의 카피대로
사키코는 하루하루 늘어가는 위장결혼의 일상 속에서 자꾸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애초의 결심조차 모호하게 만들 무렵 새로운 반전이 찾아오고,
그로 인해 사키코가 최악의 위기에 빠졌다 싶을 때쯤 마지막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만남은 작은 도화선이 되어 서로의 인생을 처참하게 어긋나게 만들기도 한다.”
이 구절대로 이 작품 속 몇몇 인물들은 안 일어났다면 좋았을 그 ‘어떤 만남’으로 인해
자신을 포함 여러 사람의 인생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말았습니다.
사소한 우연들과 어쩔 수 없는 필연들이 겹치고 겹친 끝에 태어난 참극이라고 할까요?
이런 서사는 ‘성모’나 ‘절대정의’에서도 목격했던 설정인데,
아키요시 리카코 특유의 반전 솜씨 덕분에 그 무게와 깊이가 더욱 묵직해진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절대정의’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아쉬움을 느낀 것도 사실인데,
그 아쉬움의 핵심은 “주인공 노리코 같은 사람이 정말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키코 같은 사람이 정말 있을까?”라는 의문을 읽는 내내 떨치기 쉽지 않았는데
작가가 나름대로 사키코의 진심을 세세하고 진정성 있게 그리긴 했지만
‘복수를 위해 내 남편을 죽인 자의 아내가 되다’라는 설정이
작가의 의도만큼 현실감을 100%까지 얻어내진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막판의 폭죽 같은 연타석 반전 덕분에 이런 아쉬움이 많이 상쇄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이 작품과 거의 동시에 다른 출판사에서 아키요시 리카코의 ‘유리의 살의’가 출간됐습니다.
‘성모’ 이후 그만큼의 만족감을 전해준 작품은 없었지만
여전히 아키요시 리카코에 대한 관심은 저에게는 현재 진행형이라
조만간 ‘유리의 살의’도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작열’의 아쉬움을 조금은 ‘보상’받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얼마나 가능할지 사뭇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