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공인들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종의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을 웃기는 개그맨은 평상시에도 늘 밝고 낙천적이며 웃기는 캐릭터라고 여겨지고,

반듯한 얼굴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나 아나운서는 성격과 인품 자체도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정교한 설계 속에 무자비한 살인사건과 미스터리를 직조하는 추리소설가는

꼼꼼하고 똑똑한 것은 물론 일상에서도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미지를 갖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이미지라는 게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지를 유쾌하게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요약하면, 미스터리 업자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블랙 코미디입니다.

사적으로 구입한 고가품을 취재용 구매품으로 둔갑시켜 세금을 면제받으려는 작가,

자신이 쓰지도 않은 미완성 미스터리의 을 알아내기 위해 쇼를 벌이는 가짜 작가,

여러 출판사에 작품 약속을 해놓곤 무책임한 태도만 보이는 작가,

치매 증세를 보이는 고령의 작가와 편집자가 벌이는 코미디 같은 해프닝,

시류에 편승해 내용과 무관하게 분량 늘리기에만 급급한 출판사와 거기에 끌려 다니는 작가,

알아서 줄거리와 서평을 써주는 독서 기계에 의존하는 작가-출판사-서평가들의 민낯 등

그야말로 미스터리를 둘러싼 웃지 못 할 현실들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열악해진 미스터리 출판의 현실이 꽤 많은 작품 속에서 지적되기도 합니다.

판매량이 줄어들다 보니 무리한 기획과 마케팅이 난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책에 대한 지출을 아끼는 독자들이 신인보다는 기성 작가에만 관심을 보이는 탓에

세대교체는커녕 작가-편집자-독자 모두 고령화라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미스터리의 질은 갈수록 떨어진다는 구조적 문제를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 저도 모르게 몇 번씩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도

미스터리 업자들의 안쓰러운 현실에 간혹 씁쓸한 뒷맛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수록작 가운데 미스터리의 맛이 가장 풍부한 작품은 예고소설 살인사건인데,

히트작 하나 없던 작가가 본의 아니게 살인예고소설을 쓰게 된 이후 각광을 받게 되자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으면서 추락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정통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난기가 가득한 이 작품에 대해

갈릴레오 시리즈보다는 이쪽이 진짜 히가시노 게이고다!”라는 평이 달리기도 했다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마다 다소 호불호를 심하게 느낀 저로서도

이 평에 대해서는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스터리의 이면에 대한 그의 블랙 유머와 독설을 만끽하고 싶은 독자라면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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