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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24세 여성 다나카 유키노는 옛 애인에게 원한을 품고 집에 불을 질러
그의 아내와 두 아이를 죽인 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세상은 이 ‘악마’를 당장 교수대에 세우기 바라지만
정작 유키노는 한마디 변명도 반성도 없이 교도소에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녀는 억울한 희생양일까 희대의 괴물일까?
가족부터 학교 동창, 애인의 친구, 동네 주민, 담당 의사, 교도관까지
유키노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과 고백이 쌓여갈수록 무서운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재판과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다나카 유키노는 분명 희대의 악녀입니다.
자신을 버린 연인을 증오하며 스토킹하다가 그 일가족을 몰살시켰다는 죄목 외에도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사악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언론 보도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 따윈 상관없이 그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단 한마디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항소조차 포기했던 그녀는
교도소 수감 중에도 억울하단 말도,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아 관련자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이어 작가는 그녀의 출생부터 사건 당일까지의 긴 시간을 꼼꼼한 연대기처럼 풀어놓습니다.
소개글이나 책 뒷표지의 카피를 보면 언뜻 사형제도에 대한 논쟁을 다룬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스스로 사형을 원하는 한 여자의 기구한 일대기를
주변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촘촘하게 그려낸 안타깝고 비극적인 휴먼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재미있는 건 각 챕터에 붙은 부제들입니다.
“책임감을 갖추지 못한 열일곱 살 어머니 밑에서…”, “양부의 거친 폭력에 시달렸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강도치사 사건을…”, “죄 없는 과거 교제 상대를…”, 등
최종판결문에서 그녀의 ‘사악하고 부도덕한 성장 과정’을 강조한 문장들을 부제로 삼았는데,
각 챕터마다 출생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유키노 가까이에 있던 인물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유키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무렵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의 서술이 각 챕터의 부제,
즉 최종판결문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에 본 일본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리게 하는 다나카 유키노의 일생은
한 사람의 ‘운명’이란 게 얼마나 쉽게 부서지거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원제 ‘イノセントデイズ’(Innocent days)는 번역하면 ‘순수의 날들’ 정도입니다.
실제로 유키노의 일생에도 잠시나마 ‘순수의 날들’이라는 빛나는 시절이 있었고
만일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면 그녀는 평범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 하나로 인해 시작된 악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녀를 망가뜨렸고
끝내는 자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심연을 자처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쉴 새 없이 그녀를 몰아쳤던 불행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게 만듭니다.
또, 저항도 반성도 없이 사형집행만 기다리는 그녀를 지켜보는 일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한때 유키노와 함께 ‘순수의 날들’을 공유했던 친구들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판결 후 6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법무장관이 들어선 상황에서
유키노 본인조차 거부하는 ‘진실 찾기’에 나선 친구들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지
마지막 장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어떤 엔딩이 나오더라도 착잡한 심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일본드라마가 제작됐다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무척 보기 불편한 드라마이긴 하겠지만
왠지 그 불편함 때문에 일부러라도 찾아보고 싶다는 역설적인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유키노의 인생을 조금 더 절실한 마음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