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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좋은 기억을 갖고 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을 때 다소 당황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어? 이런 이야기였나?” 아니면 “내가 간직했던 여운과는 너무 많이 다르네.” 등등...
어지간해선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나가사키’는 옛 기억과는 사뭇 다른, 아쉬움이 더 많이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패전 직후 우후죽순처럼 조직된 고만고만한 야쿠자 가운데 하나인 나가사키의 미무라 家.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뒤 어머니, 동생과 함께 야쿠자인 외숙에게 의탁한 주인공 미무라 슌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겪은 다사다난하고 일그러진 성장통을 그린 작품입니다.
한때 위세를 떨쳤지만 초라하게 무너져가는 야쿠자 집안의 명멸을 지켜보며 성장한 슌은
그 또래들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들과 조숙한 삶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밤마다 벌어지는 흉포한 문신 사내들의 질펀한 술자리를 지켜봐야 했고,
거기에 호응하는 여자들의 음란한 목소리와 웃음을 들어야만 했고,
칼에 맞거나 그보다 더 위험한 처지에 빠진 야쿠자들의 모습에 무방비로 노출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슌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순하게 전염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미무라 가의 사람이란 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릴 때부터 나가사키를 떠나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번번이 그 욕망이 좌절되긴 하지만 말입니다.
다만, 동경까지는 아니어도 야쿠자라는 족속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었고,
그런 탓에 그는 한쪽 발은 거친 세계에, 한쪽 발은 자신만의 세계에 담근 채
혼란스러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래 전 기억으로는 이 작품을 다 읽은 뒤 애틋한 여운이 꽤 남았던 것 같은데,
이번엔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라기보다는 토막토막 끊긴 미무라 슌의 일기장처럼 읽힌 탓에
‘나가사키’의 느낌은 굉장히 건조하고 무색무취에 더 가까웠습니다.
물론 자신이 의지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자신의 곁을 떠나는 걸 지켜보면서도
정작 본인은 나가사키에 발목이 잡힌 채 쇠락한 미무라 가에 남게 된 슌의 이야기는
호기심도 충분히 자아내고 긴장감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어서
그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의 내면에 가까이 갈만하면 툭툭 끊기는 이야기 때문에 좀처럼 이입이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를 나가사키에 눌러 앉힌 ‘그 무엇’에 대한 추상적이고 친절하지 못한 설명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누군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이상의 여운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제게 여운을 남겼던 건 1960~80년대라는 시간과 나가사키라는 공간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어보니 그 시간과 공간이 예전의 기억만큼 매력적으로 그려지진 않았습니다.
작품마다 꽤 호불호가 갈리는 요시다 슈이치지만 이런 정서의 작품은 대체로 좋아하는 편인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오랜만의 다시 읽기가 아쉬움만 남기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