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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네시로 가즈키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이 바로 ‘GO’입니다.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서점에서 발견한 ‘GO’에 대한 첫 인상은 “이게 뭐야?”였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악동이 마구 그린 듯한 표지에 당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날개에 실린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보곤 여러 가지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는데,
사실, 그가 재일교포 작가로는 처음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는 점보다는
그의 아버지가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 글귀에 눈길이 확 끌렸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전향과 함께 매국노 소리를 들으며 일본인 학교로 전학간 뒤 차별을 겪은 점도,
법대에 진학해 인권변호사를 꿈꾸던 그가 작가가 됐다는 점도 솔깃한 대목이었습니다.
주인공인 고교생 스기하라는 작가 본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흡사한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전직 권투선수이자 ‘북조선 국적’인 아버지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스기하라 본인 역시 조총련 계열의 민족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인 고교로 진학하며
매국노 소리와 함께 온갖 차별과 멸시를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父子) 설정만 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재일교포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예상되는데,
‘악동의 장난’처럼 보이는 표지가 예고하듯 이야기는 전혀 다른 톤으로 전개됩니다.
“이 소설은 나의 연애를 다룬 것이다. 그 연애는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자본주의니
평화주의니 귀족주의니 채식주의니 하는 모든 ‘주의’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스기하라의 일성으로 포문을 연 작가는 그야말로 예측불허, 좌충우돌 스토리를 펼쳐놓습니다.
어릴 적부터 권투선수 출신 아버지로부터 혹독하게 단련된 스기하라는
싸움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는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역사학, 철학 서적을 탐독하는가 하면,
민족학교 시절부터 절친인 정일의 소개로 일본 고전소설도 독파하는 괴짜이기도 합니다.
또, 민족학교의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관해선 코웃음을 치는 반골의 기질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후 일본인 학교로의 진학이라는 큰 결심을 했던 스기하라는
어느 날 사쿠라이라는 일본 여학생에게 홀딱 빠지고 맙니다.
“나는 재일도 한국인도 몽골로이드도 아냐.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좁은 곳에다 쳐박지 마.
나는 나야. 아니, 난 내가 나라는 것이 싫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잊게 해주는 것을 찾아서 어디든 갈 거야.”라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정작 사쿠라이 앞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를 차마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 소설은 나의 연애를 다룬 것이다.”라는 첫 일성이 있긴 했지만,
이 작품은 사쿠라이와의 연애만큼이나 지독한 스기하라의 성장통을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그 통증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그의 ‘정체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전향 때문이긴 해도) 북한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꿨지만
그렇다고 그의 일상이나 생각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입니다.
오히려 일본인 학교로의 진학을 결심한 것은 물론
재일한국인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에의 동참을 단칼에 거절하기도 합니다.
재일교포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가진 한국인에게는 더 큰 증오를 발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인 사쿠라이에게는 자신이 ‘재일 한국인’임을 밝히지 못합니다.
‘GO’는 유쾌한 성장소설이자 순수한 연애소설이면서
한편으론 10대 재일 한국인이 겪는 지독한 고민과 저항의식을 다룬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식 웃음이 나오거나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어느 논픽션이나 딱딱한 주제의 소설보다 더 깊고 묵직한 울림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이런 분위기야.”라고 단정해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스기하라를 응원하고 싶어지는 뭉클함이 마음을 뒤덮습니다.
스페인어를 공부하던 아버지가 스기하라에게 들려준 명언(?)은
앞으로 스기하라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조심스럽게 예측할 수 있는 가이드입니다.
“노 소이 코레아노, 니 소이 하포네스, 조 소이 데사라이가도.”
(나는 조선사람도 일본사람도 아닌, 떠다니는 일개 부초다. 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