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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뮤직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트렁크 뮤직’은 ‘해리 보슈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마이클 코넬리는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라스트 코요테’ 출간 이후
잭 매커보이가 주인공인 ‘시인’을 먼저 발표하면서 해리 보슈에게 ‘휴식시간’을 줬습니다.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 순전히 제 멋대로의 상상일 뿐이지만,
‘라스트 코요테’에서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33년 전 어머니의 죽음의 진상을 알아냈지만
보슈는 조금도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더 큰 고통과 회한에 빠졌는데,
그런 상태에서 또 다시 살인사건 수사에 뛰어드는 보슈를 보는 일은
쓰는 작가나 읽는 독자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국 18개월만에 다시 할리우드 경찰서로 돌아온 보슈는
(전직 상관 파운즈와는 180도 다른) 새로운 상관 그레이스 빌리츠 경위,
미워할 수 없는 파트너 제리 에드거, 그리고 아직 신참 티를 못 벗은 키즈민 라이더와 함께
의욕적으로 살인사건 수사에 뛰어듭니다. 그것도 팀장이라는 직책을 떠안고 말이죠.
보슈의 ‘복귀작’은 롤스로이스 트렁크에서 발견된 한 백인의 피살 사건입니다.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도 발견되고 사건 정황도 금세 밝혀져 쉽게 해결될 듯 보였지만
보슈는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위화감을 연이어 느낍니다.
조직폭력단이 개입됐음이 분명한데 정작 조직범죄수사계에서는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자마자 FBI와 감찰계가 보슈의 부적절한 수사를 조사하고 나섭니다.
피살된 남자의 행적을 쫓아 라스베이거스까지 갔지만 관할서의 태도도 어딘가 의심스럽고,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감추는 기색이 역력한 피살자의 아내 역시 수상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보슈가 다뤄온 사건들에 비해 다소 단선적으로 보였던 초반부를 넘어가면서
사건은 점점 규모와 깊이가 심각해지는 것은 물론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 어느 때보다 보슈는 ‘내부의 적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당하기에 이르는데,
그 위협의 단초를 제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5년 만에 재회한 옛 연인 엘리노어 위시입니다.
(엘리노어는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보슈의 연인이자 악연이었던 인물입니다.)
경찰 규정상 중죄인과의 교제가 금지된 탓에 엘리노어와의 만남은 보슈의 발목을 잡습니다.
문제는 이 ‘발목잡기’가 보슈의 수사를 방해하는 듯한 타이밍에 딱 맞춰 벌어졌다는 점인데,
그 때문에 보슈는 또 다시 수사를 중지당하고 내근을 지시받는 처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엘리노어는 이 작품에서 단지 ‘오랜만에 재회한 보슈의 연인’ 이상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녀는 보슈가 맡은 사건의 배후 또는 배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그녀 자신과 보슈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로맨스 역시 눈요깃거리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건 못잖게 독자의 시선과 관심을 잡아끕니다.
해리 보슈를 규정하는 세 가지 중요한 코드가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 ‘베트남전쟁’, 그리고 ‘내부의 적들’입니다.
‘트렁크 뮤직’을 읽는 내내 전작들에 비해 꽤 건조하고 하드보일드 냄새가 진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세 가지 코드 중 ‘어머니’와 ‘베트남전쟁’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두 코드는 보슈를 고뇌와 악몽에 빠뜨리곤 해서 매 작품마다 그에 관한 묘사가 많았는데
‘내부의 적들’만 강조된 이번 작품에선 그런 묘사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라스트 코요테’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보슈의 고뇌와 악몽이 ‘사라진’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어쩐지 살과 기름기 없이 뼈대만 튼튼한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사건에 충실한 유능한 형사 보슈’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내부의 적들’을 향한 보슈의 통쾌한 보복은 언제나처럼 짜릿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엘리노어뿐 아니라 보슈 주변에 등장한 두 명의 여성 캐릭터도 눈길을 끕니다.
꽉 막힌 관료였던 파운즈와 달리 합리적이고 융통성 풍부한 새 상관 그레이스 빌리츠 경위와
그녀가 점찍어 할리우드 경찰서로 데려온 유망한 신예 형사 키즈민 라이더가 그들인데,
보슈를 향한 ‘내부의 적들’의 공격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거세진 와중에도
두 사람은 보슈를 지키고 돕기 위해 자신들만의 소신을 갖고 수사에 임합니다.
키즈민 라이더가 이후 작품에서도 간간이 이름을 본 기억이 나는 반면,
그레이스 빌리츠의 이름은 다소 생소하게 들렸는데 이후의 행보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정작 보슈가 맡은 살인사건 수사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못했는데,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게 얽힌데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단순 살인사건에서 시작됐지만 복잡미묘하게 확장되는 이야기의 참맛은 직접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5년 만에 재회한 연인 엘리노어와의 애틋하고 위태로운 로맨스의 향방도 함께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