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하이츠의 신 1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인기작가 지요다 고키의 소설에 영향을 받은 집단 자살사건이 벌어지고, 이 사건으로 언론과 여론은 고키와 고키의 소설에 비난을 쏟아 붇는다. 절망감에 빠져 펜을 놓았던 고키는 한 신문에 실린 독자의 편지를 계기로 부활에 성공한다. 그 편지를 보낸 건 고키의 천사로 불린 익명의 소녀로, 그에 대한 유일한 옹호의 메시지였다.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 후, 한때 도쿄의 전통여관이었던 낡은 3층 건물 슬로하이츠에는 집주인인 각본가 아카바네 다마키와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지요다 고키가 모여 살고 있다. 어느 날, 미소녀 가가미 리리아가 나타나자 모두 그녀를 10년 전 고키의 천사라 추측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첫 번째 이유는 일본 미스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인데다 인터넷서점에서 그렇게 장르를 구분해놓았고, 첫눈에 띈 카피가 지요다 고키의 소설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그날의 날씨는 더없이 맑았다. 소노미야 쇼고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자살 게임. 참가자 열다섯 명은 전원 사망했다.”라서 아무런 의심(?)없이 제가 좋아하는 일본 미스터리라고 확신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탓에, 1권 중반부까지만 해도 도대체 미스터리는 언제 시작되는 거지?”라며, 슬로하이츠 멤버들의 크고 작은 일상만을 다루는 이야기에 살짝 의구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권까지 모두 읽고 난 지금, 그 어느 매력적인 미스터리 이상의 충족감을 느낍니다.

 

엄밀히 말하면, ‘슬로하이츠의 신은 미스터리 장르로 구분하긴 어려운 작품입니다. “자신이 믿는 세계를 완성하려는 젊은 창작가들의, 치열하기 때문에 더없이 눈부신 날들이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가 이 작품의 진짜 화두이자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 부화조차 못한, 아니, 부화할 가능성조차 불투명한 지망생들이 서로에게 때론 따끔한 채찍을, 때론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그러면서 밝음과 어두움을 번갈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하는 이야기, 또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둔 과거 때문에 아프기도 웃기도 사랑하게 되기도 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몇 개의 미스터리들... 이것이 슬로하이츠의 신의 진면목입니다.

 

25살의 나이에 일본에서 각광받는 각본가가 된 집주인 아카바네 다마키와 엄청난 사건을 딛고 다시 인기작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지요다 고키를 제외하곤 슬로하이츠의 멤버들은 아직 채 무엇이 되지 못한 20대 중반 지망생들에 불과합니다. 아동만화가를 꿈꾸지만 너무 착한 이야기만 만드는 탓에 늘 편집자에게 퇴짜 맞는 가노 소타,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주장감정도 없는 기획만 내놓는다고 비판 받는 나가노 마사요시, 화가를 꿈꾸지만 의존적인 성격 탓에 그림도, 일상도 엉망이 된 모리나가 스미레, 누구보다 다마키를 존중하지만 그녀의 성공을 견디다 못해 슬로하이츠를 뛰쳐나간 엔야 등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 앞에 툭 던져진 다양한 군상의 20대들이 그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단지 치열하고 눈부신 청춘들의 이야기란 뜻은 아닙니다. 앞서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몇 개의 미스터리들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누가? ?’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현실적인 미스터리들이 있는가 하면, 막판에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덩치는 작지만 폭발력은 엄청난 미스터리도 포함돼있습니다.

 

사실, 이 미스터리들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독자는 그보다 어떻게그 미스터리의 진실들이 풀리게 될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츠지무라 미즈키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데 통쾌했으면 좋겠다, 싶은 지점에선 여지없이 속 시원한 장면들이 등장하고, 안쓰러워 죽겠다, 싶은 지점에선 그에 어울리는 따뜻한 해법이 등장하는가 하면, 예측 가능하고 신파 스타일로 이야기가 풀리는 대목에서조차 눈가를 뜨끈하게 만듭니다. 아직 못 읽은 그녀의 작품이 많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고, 이 작품을 인생작이라고 말한 일본 독자들의 평가에도 저절로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장황하게 호의적인 서평을 쓰고도 기어이 별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분량때문입니다. 일본 작품들 가운데 연재물인 경우 단행본으로 묶으면 분량이 과해지곤 하는데, ‘슬로하이츠의 신도 그런 경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2권 합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이야기의 규모나 서사에 비해 다소 길고 넘쳐 보인 게 사실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 작품을 판타지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슬로하이츠 멤버들은 시고 떫고 씁쓸한 여정을 거쳐 나름의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현실의 지망생들이 이들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픽션 대신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란 말밖엔 해줄 수가 없습니다. 판타지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힘과 미덕을 지녔다면, 또 그 힘과 미덕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의 힘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정성껏, 천천히, 시간을 들여란 뜻을 담아 집 이름을 슬로하이츠로 삼은 다마키의 마음 역시 그 힘과 미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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