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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코요테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4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꽤 오래 전 마이클 코넬리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이 ‘라스트 코요테’였습니다.
그 뒤로 팬이 되어 출간순서 같은 거 따지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어왔는데,
거의 10년만에 다시 만난 ‘라스트 코요테’는 첫 인상 때와 마찬가지로 명품 그 자체였습니다.
메인 스토리는 33년 전 어머니 마저리 로우를 살해한 범인을 찾는 보슈의 고된 여정입니다.
LA를 휩쓴 지진으로 집은 붕괴될 위기에 처하고 보슈 본인은 무기 정직을 당한 상태입니다.
경찰국의 명령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된 보슈는
더는 늦출 수 없는 자신의 사명, 즉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배지와 총을 반납한 상태에서 보슈는 과거 수사 자료를 확보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지만
누가 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엉터리 방식으로 수사가 진행됐음을 알게 됐고,
매춘부였던 어머니와 관련 있는 인물들(검사, 후원자, 포주, 친구)의 행적까지 파악합니다.
보슈는 생각보다 빨리, 명확하게 진실을 캐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지만 늘 그랬듯 그의 앞엔 수많은 함정과 덫과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슈의 처지는 그야말로 사방에 적 또는 낭떠러지만 존재하는 ‘위기일발’ 그 자체입니다.
지진으로 집을 잃게 생겼고, 상관 폭행혐의로 무기한 정직을 선고받은데다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은 오히려 보슈의 스트레스와 분노를 자극할 뿐입니다.
지진으로 터전을 잃은 삐쩍 마른 코요테 한 마리에게 동정심과 동질감을 느낄 정도로
보슈의 삶이 더 이상 피폐해질 수 없는 지경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33년 전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보슈에게는 주저할 것도 두려워할 일도 없습니다.
정직상태의 불리함을 회피하기 위해 상관의 신분을 도용하기도 하고,
어머니와 함께 매춘부 생활을 했던 여인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내기도 하고,
엉터리 수사를 했던 당시 담당형사를 만나기 위해 플로리다까지 날아가기도 하고,
지문 대조를 위해 그답지 않은 애걸복걸과 그다운 무자비한 압박을 겸비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함으로 똘똘 뭉친 보슈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이라는 더 이상 무거울 수 없는 주제가 깔려있다 보니
어느 한 대목도 가볍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상관 폭행으로 드러난 그의 폭발적 스트레스에 대해
정신과 의사로부터 ‘블루 앙스트(우울한 고뇌)’라는 진단까지 받게 된 것은 물론,
수사 과정에서 적잖은 희생이 벌어지고 그것이 자기 탓이라는 자괴감에 빠진 보슈가
자신의 삶과 직업을 저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는 한없이 안쓰럽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심지어 보슈는 이 사명을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라는 자책에 이르기도 합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뒤 보슈가 조금도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더 큰 고통과 회한에 빠지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인데,
그래선지 작가가 이 작품 뒤에 바로 보슈의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고
잭 매커보이라는 새 주인공을 앞세워 ‘시인’이란 작품을 내놓은 것은
어쩌면 보슈에게 휴식을 주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보슈는 ‘사랑’을 합니다.
옛 담당형사를 만나기 위해 날아간 플로리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또다시!) 어딘가 보슈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 ‘그림 그리는 여자’ 재스민 코리언입니다.
어머니의 진실을 찾는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여정 가운데 유일한 안식을 준 인물이지만,
그녀 역시 보슈가 짐작조차 못한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집니다.
출간연도로만 보면 ‘라스트 코요테’ 이후 2년 뒤에나 다음 작품인 ‘트렁크 뮤직’이 나왔는데,
과연 그때까지 재스민과의 인연이 이어질지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트렁크 뮤직’ 역시 오래 전에 읽었지만 전혀 기억이 없네요.)
보슈의 캐릭터를 규정하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베트남전쟁’은 거의 등장하지 않은 반면
‘어머니’와 ‘내부의 적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그려진 작품입니다.
‘어머니’가 보슈의 깊은 슬픔과 고통의 서사를 전하고 있다면,
‘내부의 적들’은 독자로 하여금 분노와 통쾌함을 번갈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즉, 스릴러에서 맛볼 수 있는 두 가지 최고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뒤죽박죽 순서 없이 읽은 ‘해리 보슈 시리즈’ 가운데
(내용은 다 까먹었지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기억하고 있던 게 이 작품이었는데,
그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인상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사족으로...
번역에 관해 몇 군데 애매하거나 아쉬움이 느껴진 대목이 있었는데,
제가 읽은 건 구판이라 표지가 바뀐 개정판에서는 수정됐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