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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평점 :
요즘은 타인의 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모는 선의든 악의든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재료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인격의 일부인 외모를 비하하거나 희롱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의 외모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며 고민하거나 더 나아가 집착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아내는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입니다.
‘조각들’의 주인공은 미스 월드 일본 대표에 뽑힐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지닌 것은 물론
뷰티클리닉 원장으로서 큰 유명세까지 얻은 미용외과 의사 다치바나 히사노입니다.
히사노는 지방흡입술을 받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초중고 동창인 유키 시호를 비롯
비만, 단신, 못생긴 코 등으로 인해 고민하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외모강박증’이라는 꽤 민감한 주제를 직설적으로 다루는 것과 함께,
한 소녀의 미스터리한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한 조심스러운 여정을 동시에 풀어놓습니다.
재미있는 건, 정작 히사노의 ‘대사’는 한마디도 없이 모두 상대방의 ‘대사’로만 구성된 점인데,
덕분에 독자는 매 챕터마다 히사노의 ‘외모강박증 비판’을 반복해서 읽을 필요가 없었고,
동시에 히사노가 마주하게 된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강하게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등장인물들은 크게 보면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히사노와 초중고 동창인 부모세대가 한 축이고 그들의 자식세대가 나머지 한 축인데,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비만 모녀’인 요코아미 야에코-기라 유우와 모두 연결돼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64kg의 몸무게 때문에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던 요코아미 야에코 주위에는
완벽한 외모의 히사노, 깡마른 언니와 뚱뚱한 동생 자매, 땅꼬마로 불린 단신 소년 등
극과 극을 달리는 외모의 소유자들이 포진돼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된 지금도 그들에게 있어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과거는
대부분 어린 시절 외모와 관련된 에피소드나 해프닝들입니다.
자식세대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뚱뚱하지만 밝고 쾌활한 성격의 기라 유우 주위에는
코 콤플렉스를 가진 조연 배우, 비만 때문에 학생들에게까지 모욕당하는 교사,
소녀의 비만을 죄악 또는 부모의 학대라고 여기는 어른 등
하나 같이 외모를 너무 중시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외모에 대한 독설과 직설은 때론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로 가혹하면서도 흥미를 자극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도넛에 파묻혀 자살한 소녀의 미스터리도 끝까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다만, ‘외모’와 ‘자살’이라는 두 개의 화두가 제대로 잘 섞이진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소녀의 죽음의 진실은 두 개의 화두를 잇기 위해 다소 억지를 부린 듯 했고
외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완벽한 미모의 미용외과 의사 히사노’가
정확히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도 명확히 전달되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자칫 뻔해질 수 있는 소재를 색다르게 직조한 노력은 분명히 눈에 띄었지만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내진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히사노가 만난 인물들이 늘어놓은 ‘없어도 무방한 장황한 개인사’도 눈에 거슬렸는데
굳이 주제와 무관한 사족 같은 이야기들이 이렇게 많이 필요했나,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몰입하거나 집착하는 요즘의 시대에
나름 여러 가지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준 작품인 건 사실입니다.
독자마다 미나토 가나에의 메시지에 대해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고,
특히,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작품입니다.
적절한 분량과 간결한 문장으로 이뤄진 작품이니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