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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 서커스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6월
평점 :
특이한 제목에 눈길이 끌렸다가 작가 이름을 보곤 한참을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한국에서 제법 미스터리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던 ‘앨리스 죽이기’조차 별 3개를 줬고,
‘장난감 수리공’은 수록된 두 작품 중 표제작만 읽은 뒤 서평도 쓰지 않았으며
‘기억파단자’는 절반도 못 가서 포기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재도전하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일단, 흡혈귀와 인간의 대결이란 설정 때문에 꽤 잔혹한 장면들이 많으리라 예상했는데
초반부터 그 예상을 백배는 뛰어넘는 기상천외한 묘사들이 등장합니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몸이 찢겨나가고, 내장이 튀어나오고...
그런데 역겹다기보다는 19금 괴수 애니메이션이나 팔다리가 툭툭 잘리는 B급 코믹영화처럼
뭔가 경쾌한 리듬을 탄 듯한 ‘흥미진진한 살육 쇼’를 읽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초반부터 독자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 작가는 이내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짧게 요약하면...
흡혈귀 사냥꾼들이 서커스단으로 위장한 채 암약 중이라는 정보를 들은 흡혈귀 조직은
때마침 인근에서 공연준비 중인 한 영세 서커스단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이 영세 서커스단은 10명 남짓한 멤버로 겨우 버티고 있는 ‘진짜’ 서커스단입니다.
그런데 하필 이 서커스단의 멤버 한 명이 전설적인 흡혈귀 사냥꾼과 이름이 비슷했던 탓에
흡혈귀 조직은 이들을 사냥꾼으로 규정하곤 총공격을 진행합니다.
남녀노소 골고루 포진한 흡혈귀 조직의 공격력은 막강 그 자체입니다.
쉽게 죽지도 않고, 치명상을 입어도 금세 회복되며, 잔인함은 극에 달할 정도입니다.
그에 비해 서커스단 멤버들은 자신의 주특기 외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평범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의외의 전개를 보이기 시작하고,
전설적인 흡혈귀 사냥꾼과 이름이 비슷한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히어로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출판사에서는 ‘잔혹 배틀 스릴러’라는 장르명을 붙였지만
나름 미스터리와 반전의 품격도 곁들이고 있어서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뭔가 모호하고 애매했던 ‘앨리스 죽이기’에 비해 비교적 선명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고,
호러와 잔혹함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순 있어도 개인적으론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제나 의미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로는 제격인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흡혈귀라는, 개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설정과 ‘배틀’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서
조금은 야박한 평점을 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쪽으로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작품과 또 다시 만나게 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지간해선 홍보글이나 소개글은 물론 띠지나 표지의 카피조차 안 읽고 책을 읽는 편이지만,
혹시라도 들여다본 그의 신작 홍보글에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끄는 설정이 있다면
이 작품처럼 고민하고 주저하다가 결국엔 집어들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