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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후 너는 죽는다 ㅣ 밀리언셀러 클럽 9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일본 미스터리에 빠져들기 시작한 2007년 전후쯤, ‘13계단’과 ‘그레이브 디거’로 만난 다카노 가즈아키는 매력덩어리 그 자체였습니다. 신선한 충격과 함께 이후 출간될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는데, ‘제노사이드’와 ‘KN의 비극’은 재밌게 읽었지만 무슨 사연인지 이 작품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데뷔작이자 베스트셀러인 ‘13계단’은 사형제도에 대한 고찰과 함께 사형이 확정된 수감자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속도감 넘치는 미스터리였지만, 인류보다 진화한 새로운 생물의 등장을 소재로 한 ‘제노사이드’나 빙의를 소재로 생명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KN의 비극’을 보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관심이 꽤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표제작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를 포함 모두 6편의 중단편이 실린 이 작품집은 예지력, 즉 미래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야마하 케이시라는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매 수록작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또는 공포에 휩싸인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케이시는 직간접적으로 그들의 미래에 대해 충고나 경고를 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케이시는 모든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자는 아닙니다. 5살 때, 고열로 죽음의 위기를 겪은 후 예지력을 얻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의 케이시는 ‘비일상적인 상황’만을 예지할 수 있습니다. 즉, 죽음이나 사고 등 평범한 일상에선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미래는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수록된 여섯 작품 모두 사건이나 사고를 다룬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성장기나 로맨스를 다룬 작품도 있고 슬쩍 빙의라는 소재를 얹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모든 주인공들은 출구 없이 답답할 뿐인 현재와 온통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잔뜩 웅크린 채 살아가는 청춘들로 설정돼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우연 또는 운명으로 케이시와 마주한 그들이 예지능력자 케이시의 도움과 조언에만 기대어 공짜로 해피엔딩을 얻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일말의 힌트를 얻은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으로 현재를 극복합니다. 살해될 운명을 비껴갈 때도, 심연 같은 좌절에서 작은 희망을 품게 될 때도 그것은 케이시의 도움 덕분이라기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힘과 의지가 작동한 결과입니다.
재미있는 건, 표제작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에서 타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 분투하던 케이시가 마지막 수록작인 ‘3시간 후 나는 죽는다’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예지하게 되지만, 그는 “그것은 나의 운명이며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예지된 미래나 운명은 과연 바뀔 수 있는가, 라는 고전적인 주제도 함께 그리는데 할리우드 급 액션과 애틋한 멜로가 함께 병행돼서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수작입니다.
예지력이라는 초능력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다카노 가즈아키가 그린 소박하지만 팽팽한 미스터리 판타지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아주 작은 고민과 상상에 빠져볼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주위에 케이시 같은 인물 하나쯤 없을까, 하는 낯선 판타지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