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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은 밤을 걷는다
우사미 마코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7월
평점 :
“이 도시 한복판에는 밥공기를 엎어놓은 것 같은 봉긋한 산이 있다. (중략)
400여 년이나 머리에 성을 이고 살았던 성산에는 이 도시를 지배하는 힘이 있는 듯 하다.
그 힘은 산기슭과 너른 들판에 두루두루 퍼져 있다.” (p9~10)
첫 장부터 서늘한 불길함을 암시하며 시작되는 이 작품엔 총 10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등장인물들이 교차 등장하는 연작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인데,
특이한 건, 호러, 기담,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포진돼있다는 점입니다.
첫 장의 불길한 암시대로 수록작마다 성산의 저주인 듯한 끔찍한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외딴 섬처럼 지내던 여고생이 갑자기 실종되고 그녀의 남친은 광기에 휩싸이는가 하면,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려진 오랜 그림 속에서 현재의 악몽을 발견하는 여자도 있고,
대물림된 알코올중독과 가정폭력이 결국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죽은 자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자, 사람보다 동물과의 소통에 능한 소년,
악의를 가진 자만 죽이는,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기괴한 형태의 생물체 등
주요 캐릭터들 역시 평범한 소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성산 자체가 어떤 마성을 띄거나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그 일대에서 대략 20여년에 걸쳐 벌어진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역시 성산은 그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평범한 산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교시절만을 성산 일대에서 보냈던 한 여자의 독백은 성산의 불길함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불행이 너무 잇따른다. (중략) 여기는 뭔가 이상하다. 특히 이 성 주변은. (중략)
성을 짊어진 울퉁불퉁한 땅과 번성한 식물들에게서까지 왠지 이상야릇한 힘이 느껴졌다.
모든 것에 그림자를 드리워 빛나는 것을 흐리게, 예리한 것을 둔탁하게,
새로운 것을 녹슬게 하는 부정적인 힘이 여기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p301~303)
다 읽고 나면 “이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라고 대놓고 으스대는 작품들에 비해
이 작품처럼 천진난만하거나 소소한 느낌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저절로 소름 돋게 만드는 이야기가 얼마나 큰 매력을 지녔는지 알게 됩니다.
뭐랄까...? 천천히 곱씹어 생각할수록 점점 더 무서워지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성산은 사건의 주요 무대이면서도 마치 ‘병풍’처럼 조용히 이야기를 떠받치고만 있을 뿐인데,
만약 성산이 노골적으로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이나 공포감을 갖는 존재로 설정됐다면
모르긴 해도 이 작품의 매력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을 것입니다.
오히려 초반에 친근한 뒷산 같은 느낌으로 그려진 탓에 더욱 불길해진 성산의 이미지는
이 작품의 가장 튼튼한 밑받침이자 무의식중에 공포의 원천이 돼줬다는 생각입니다.
꽤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지만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우사미 마코토입니다.
호러와 미스터리와 판타지가 뒤섞인 장르가 그녀의 주된 특기라고 하는데,
50세 언저리에 데뷔해서 60세인 2017년부터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고 하니
조만간 우사미 마코토의 다른 작품들을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다음 작품 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