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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5 ㅣ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5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보스턴경찰서 강력반 형사 제인 리졸리와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 콤비의 다섯번째 작품입니다.
‘리졸리&아일스 시리즈’는 엽기적이고 잔혹한 범행을 소재로 삼아 독자의 눈길을 끌면서도
그 소재에 함몰되지 않고 선명하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 전개를 자랑하는 시리즈입니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이란 점이 눈에 띄는데,
‘소멸’ 역시 속임수에 넘어가 환상을 품은 채 미국으로 건너온 뒤
지독한 방식으로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동유럽 여성들이 피해자로 등장합니다.
시체보관실 냉동고에서 깨어난 여성이 경찰을 죽이고 인질극을 벌입니다.
문제는 인질 가운데 출산을 코앞에 둔 만삭의 리졸리가 포함됐다는 점.
리졸리의 남편인 FBI요원 게이브리얼 딘은 협상을 통해 인질극을 해결하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워싱턴의 고위직들은 무력진압만을 계획할 뿐입니다.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리졸리는 인질범이 남긴 ‘밀라’라는 여성의 이름에 집착하지만
갓 태어난 딸 레지나 때문에 수사는커녕 엉망이 된 일상 속에서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인질극의 진상이 밝혀지자 리졸리는 남편 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수사에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무척 오래 전에 읽었던 탓에 이야기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난 시신’이란 초반 설정만큼은 기억하고 있어서 초반부터 꽤 긴장된 책읽기가 됐습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인질극, 서서히 드러나는 인질범의 정체, 집요한 언론이 자아낸 위기상황,
무슨 이유에선지 수사에 적극 개입하려는 워싱턴의 고급 기관 등
할리우드에서 많이 다루는 ‘부패권력층에 대한 응징’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거기에 덧붙여 출산 전후의 리졸리의 고뇌와 갈등이 곁들여지면서
독자는 한시도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는 책읽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감언이설에 넘어가 미국으로 온 동유럽 여성 밀라의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지는 챕터들은
미국 내 5만 명이 넘는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 겪는 노예 같은 삶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데,
마치 아무렇게나 버려도 될 ‘물건’처럼 취급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그녀들의 운명은
단순한 ‘악에 대한 분노’ 이상의 감정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엄마’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리졸리가 출산 후 남편 딘과 겪는 갈등도 흥미로운데
뼛속까지 타고난 형사인 리졸리가 ‘초보엄마 수난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
누구보다 자신의 성질을 잘 아는 남편 딘과의 갈등을 어떻게 봉합해나가는지,
또, 자신을 빼닮은 고집쟁이 딸 레지나와 함께 위기에 빠진 그녀가
어떻게 사건을 해결하고 딸 레지나를 지켜내는지 내내 호기심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번역하신 박아람 님은 스릴러의 품격이나 문학적 완성도 면에서
‘소멸’이 지금까지 출간된 시리즈 가운데 최고라는 호평을 내렸는데,
크게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구성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야기 전개가 ‘기-기-기-결’처럼 읽혔다는 점입니다.
정작 중요한 ‘악과의 대결’은 후반부의 왜소한 분량을 통해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반면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기 전의 ‘몸 풀기 단계’는 조금은 길고 느슨하게 구성됐다는 얘깁니다.
그래선지 ‘기승전결’의 흐름이 아니라 계속 ‘기’만 이어지다가 갑자기 ‘결’이 나온 듯 했는데,
물론 그 긴 ‘기’들 역시 매력적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급한 마무리는 아쉽기만 했습니다.
한국에 소개된 ‘리졸리&아일스 시리즈’는 모두 여덟 편입니다.
10여 년 만에 ‘순서대로 다시 읽기’에 도전하고 있는 중인데,
이제 세 편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는 12편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뒤늦게라도 남은 시리즈가 출간되길 바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