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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모형의 밤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한밤중에 읽기엔 왠지 꺼려지는 제목만큼이나 내용 역시 기괴하고 독특한 작품입니다.
인생 자체를 롤러코스터처럼 살았다는 작가의 이력이 그대로 반영된 느낌이랄까요?
지독한 호러물인데도 수록작 가운데에는 꽤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도 들어있고,
‘싸늘해진 코’, ‘굶주린 귀’, ‘뼈 먹는 가락’, ‘다카코의 위 주머니’ 등의 소제목대로
인체 기관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 구성은 특이함을 넘어 소름이 돋을 때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머리가 이상한 학자’가 설계하고 지은 기괴한 목저택을 아지트로 삼은 한 소년이
철거 직전 지하실에서 인체모형 오브제인 ‘갈라테이아’를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눈에는 조개껍질이, 귀에는 플라스크가, 갈비뼈 안쪽엔 황동거울이, 위장의 자리엔 황산병이,
그리고 사방팔방을 가리키는 여덟 개의 팔이 달린 그 인체모형에 몰입한 소년은
그 안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각각 20여 페이지 남짓한 단편 분량의 수록작들은 인체모형의 기관들이 소년에게 들려주는,
때론 끔찍하거나 공포로 가득한, 때론 기괴하지만 따뜻함이 깃든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바라보는 사람에게 병이나 재난을 갖고 온다는 사안(邪眼),
예민한 코를 가진 탓에 끔찍한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조향사,
습관적으로 이웃집을 도청하다가 위기에 빠지는 퀴즈작가,
무릎에 사람의 얼굴 형태를 지닌 기이한 인면(人面) 종기가 난 한 남자의 비극,
저주받은 명곡을 몰래 차지하려던 탐욕 덕분에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퇴물 가수,
악질 공원묘지 직원을 향한 억울한 혼령들의 통쾌한 복수,
무성(無性)에 집착한 나머지 성기를 제거하고 천사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남자 등
말 그대로 기발한 발상과 예측불허의 호러 코드로 꽉 채워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제목만은 여러 차례 들은 적 있는 ‘가다라의 돼지’를 비롯
나카지마 라모의 몇몇 작품들이 한국에 출간된 걸로 아는데,
번역자에 따르면 작품마다 색깔이 달라서 딱히 어떤 성향이라고 규정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대중적이라기보다는 마니아 분위기가 강한데다
자신의 예언대로(?) 갑작스럽게 변사한 탓에 한국에서 더 많은 작품이 소개되긴 어렵겠지만
기회가 되면 한두 편쯤은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인체모형의 기관들이 들려준 기괴한 이야기를 전부 들은 소년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