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휴양지 브르타뉴 해변의 호텔 128호실에서 소설 원고를 발견한 안느 리즈는

원고 안에 적힌 주소로 원고와 발견 정황을 담은 편지를 발송한다.

이를 받은 회사원 실베스트르는 그 원고가 자신이 33년 전 캐나다에서 잃어버린 것이며,

뒷부분의 내용은 자기가 쓴 게 아니라는 답장을 보낸다.

독특한 사연에 호기심이 생긴 안느 리즈는 128호실의 이전 숙박객에서부터 조사를 시작해

원고가 어쩌다 캐나다에서 한적한 프랑스의 해변 호텔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아내고자 한다.

원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과 편지로, 또 직접 만나 원고를 얻게 된 사연을 들으며

안느 리즈는 이 원고가 잠시라도 그걸 소유했던 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어쩌면 제가 이 작품을 읽게 된 계기 자체가 이 작품 속 사연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1년 내내 장르물만 찾는 제가 낯선 프랑스 작가의 순문학을 읽을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인데,

(무슨 책을 선물로 받을지 알 수 없었던) 한스미디어 카페의 소소한 이벤트 덕분에

(안 그랬다면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던)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안느 리즈의 조사에 따르면 원고는 우연과 운명처럼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됐는데,

특이한 건, 크고 작은 상처로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가던 그들이

누군가에게 전해 받은 그 원고 덕분에 기운을 내거나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33년이란 시간이 말해주듯 그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에 이 원고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주고받는 지금은 과거를 찬찬히 돌아볼 수 있는 50대 이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 우연히 또는 운명처럼 내 손에 들어온 그 원고 덕분에...”라는 말과 함께

안느 리즈의 조사에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도움을 줍니다.

 

‘128호실의 원고는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두 서간체로 쓰인 작품입니다.

원고를 찾아낸 안느 리주와 원고의 원작자인 실베스트르가 주고받은 편지뿐 아니라

이 원고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도 포함돼있습니다.

그 편지들 속엔 원고의 이력에 관한 미스터리만 실린 게 아닙니다.

이 원고로 인해 새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의 두렵지만 심장을 뛰게 하는 흥분과 감정,

이 원고 때문에 잊고 있던 과거의 상처, 또는 새롭게 알게 된 진실과 직면한 사람들의 충격,

또 이 원고 덕분에 세상 또는 사람들을 향한 철벽을 거두게 된 사람들의 크고 작은 변화 등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매력적인 편지들 속에 담겨있습니다.

 

원작자가 쓰지 않은 후반부를 채워 넣은 또 다른 작가를 찾는 여정은

예상 밖의 반전과 함께 ‘33년간의 우연과 운명이 낳은 따뜻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하는 훈훈함은 말할 것도 없고

미스터리의 엔딩 못잖은 짜릿함까지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 편의 원고가, 그것도 책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무명작가가 쓴 소설 원고 한 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놓는다는 건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비현실성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원고를 소유했던 사람들,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사연에 훈기와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설계와 그에 걸맞은 인물들의 풍부한 사연과 감정들은

다 읽은 뒤에도 여전히 내가 그 편지들을 주고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느껴지게끔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생생한 리얼리티와 감동을 남겨줬습니다.

 

고백하자면, 받고 보니 미스터리가 아니네, 라는 생각에 책장에 고이 묻어두려 한 게 사실인데

장르물 독자 손에 우연히 들어온 낯선 프랑스 순문학 한 편의 여운은 꽤 오래 갈 듯 합니다.

300페이지를 갓 넘기는 분량인데다 매력적이고 빠른 템포의 편지체라 금세 읽을 수 있으니

덥고 습한 날씨에 짜증이 나있거나 사람 때문이든 일 때문이든 심신이 지쳐있다면

‘128호실의 원고를 통해 조금이나마 따뜻함과 힘과 위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첫 페이지에 등장인물 소개가 나오는데, 앞의 세 사람 정도까지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원고를 소유했던 인물들에 대한 소개인데

자칫 읽는 재미를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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