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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나무꾼
쿠라이 마유스케 지음, 구수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평점 :
성공한 변호사 니노미야는 쾌락과 분노 외엔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어느 날 괴물 마스크를 쓴 남자에게 도끼로 공격당하지만 천운으로 살아남은 그는
“너희 같은 괴물들은 죽어야만 한다.”는 괴물 마스크의 한마디에 의구심을 품고
복수를 위해 그의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한편 도쿄에서는 사람을 살해하고 뇌를 꺼내 가는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 수사가 진행된다.
경시청 형사 토시로 란코와 관할서 형사 이누이는 탐문과 조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이 26년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괴 사건과 연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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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발상에서 출발해서 예상치 못한 엔딩까지 빠른 속도로 달리는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사이코패스’와 ‘뇌 과학’이라는 소재도 흥미롭고,
기이한 살해수법, 연쇄살인 이면에 숨은 비극적인 과거사, 뜻밖의 범행동기 등
미스터리의 모든 요소가 정교하고 탄탄하게 잘 엮여 있습니다.
사이코패스 변호사 니노미야가 자신을 죽이려 한 괴물 마스크를 찾는 과정과
란코-이누이 형사 콤비가 ‘뇌 도둑’ 연쇄살인범을 찾는 과정이 한 챕터씩 번갈아 등장하는데
두 이야기가 하나의 접점을 향해 달려가면서 이야기는 더욱 속도감을 높입니다.
특히 프롤로그에 소개된 26년 전 유괴사건의 실체가 설명되는 중반부쯤부터는
‘누가 범인인가?’ 못잖게 ‘괴물은 어떻게, 왜 탄생됐는가?’라는 테마가 독자의 눈길을 끄는데
이 부분은 엽기적이고 역겨운 느낌과 함께 비극적인 정서까지 함께 내포하고 있어서
미스터리 이상의 묵직한 주제의식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워낙 많아서 자세한 소개는 어렵지만
이 작품의 메인 소재인 ‘사이코패스와 뇌 과학’은 어쩌면 근미래에 실현될 수도 있는
아주 위험천만하면서도 유혹의 힘이 강한 분야라는 생각입니다.
직전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숙명’, 노장 딘 쿤츠의 ‘사일런트 코너’, ‘위스퍼링 룸’ 역시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조종하기 위한 사악한 뇌 과학을 다룬 작품이었는데,
미지의 영역인 인간의 뇌를 신처럼 좌지우지하려는 욕망이 왜곡된 목적을 갖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참혹한 비극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궤는 달라도 ‘괴물 나무꾼’과 비슷한 주제의식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연쇄살인범을 쫓는 란코-이누이 형사 콤비의 이야기가 왜소해 보이는데
그건 아무래도 24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고,
또 작가가 의도적으로 (사족처럼 보일 수 있는) 수사과정을 생략한 탓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좌천되어 관할서로 내려온 이누이 형사와 신참 티가 나는 란코 형사를 잘 활용했다면
이들 콤비의 이야기 역시 ‘사이코패스와 뇌 과학’ 못잖게 흥미로운 내용이 됐을 것입니다.
미스터리와 주제 모두 매력적인 작품인 건 분명한데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치기 어리거나 아마추어 티를 벗어나지 못한 유치한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다는 점입니다.
올드함의 대명사인 “아니 뭐라고!”는 기본이고,
불필요한 동어반복식 되물음이나 독자의 수준을 너무 얕잡아본 투의 문장도 꽤 많았습니다.
특히 초반에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원작 자체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번씩이나 헛웃음이 난 나머지 남은 분량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흔들린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중반 이후부터는 이런 아쉬운 상황들이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데뷔작이지만 복잡다단한 설계를 능숙하게 해낸 점이나 미스터리의 맛을 잘 살린 걸 보면
작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2018년에 이 작품이 나왔으니 이제 슬슬 신작 소식이 들릴 때도 된 것 같은데,
‘괴물 나무꾼’이 호평을 얻는다면 머잖아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