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웃는 숙녀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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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초,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네 번째 작품인 악덕의 윤무곡을 읽은 뒤

당분간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좀 멀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품 제목에 클래식 작곡가의 이름이 들어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주인공 캐릭터가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은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그리고 초기 소개작이라 잘 몰랐던 법의학 교실 시리즈를 제외하곤

스탠드얼론을 포함 국내 출간작 23편 중 12편을 읽은 셈이었는데,

악덕의 윤무곡을 읽곤 왠지 나카야마 시치리에 대한 피로도가 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묘한 분위기를 내뿜는 핑크빛 표지와 비웃는 숙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 탓에

또 다시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집어 들고 말았습니다.

이것까지만, 그리고 한 1년은 나카야마 시치리는 쉬자, 라고 생각하며 말이죠.

하지만...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속도감, 긴장감, 다소 과한 폭력성과 선정성, 막판 반전 등

재미 면에서 보면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점이 가장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

이 작품까지 제가 읽은 13편 가운데 Top3에 꼽아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까지는 아니지만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포함돼있습니다.

미리 봐도 별 문제는 없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뛰어난 미모와 화술, 상대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극강의 카리스마를 지닌 가모우 미치루는

중학생 시절 자신의 첫 사냥을 시작한 이래 순탄하게 소시오패스로서 진화를 거듭합니다.

그녀의 사냥감은 대부분 필요와 목적에 따라 선정되기지만,

때론 즉흥적으로 또는 우연히 선정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녀의 진정한 악마성은 사냥을 위해 누군가를 완벽히 조종하는데 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냥에서 그녀는 자신의 피에 손을 묻히는 일이 없습니다.

대신 자신에게 흠뻑 빠져든 누군가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사냥하게 만든다는 얘깁니다.

 

이 대목에서 아마도 도나토 카리시의 속삭이는 자 시리즈를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 텐데,

사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정신 조종자가 다소 호러 느낌이 들기도 하고

독자에 따라 저게 가능해?”라며 비현실적이라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반해,

나카야마 시치리가 창조한 진정한 악녀 가오루 미치루의 조종은 너무나도 현실적입니다.

물론 그녀의 사냥을 위해 선택된 누군가는 대부분 벼랑 끝에 선 위태로운 사람들입니다.

 

학교폭력에 시달린 나머지 살의에 물든 여중생,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쇼핑 중독에 빠진 나머지 감당 못할 횡령을 저지른 은행원,

취업 문제 때문에 가족에게 바보 취급을 받은 나머지 극도의 스트레스에 빠진 청년,

그리고 해고된 후 소설가가 되겠다는 공상에 빠진 채 가족을 내팽개친 남편을 둔 주부 등

옆에서 누군가 버튼 하나만 눌러주면 그대로 폭발하고도 남을 임계점에 이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고민해주는 미치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 정도로 빠져드는데,

결국 미치루의 친절한 조언한마디에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고 마는 것입니다.

 

소소한 이야기 몇 가지만 더 하자면...

사실 읽으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여러 번 떠오르기도 했는데,

두 작품 사이에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들도 여럿 있기 때문에

비교해보면서 읽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 번역하신 문지원 님은 이 작품을 이야미스 계열로 설명했는데,

(이야미스 =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음습한 심리를 섬세하고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읽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찝찝해지는 장르)

개인적으론 오히려 독자 대부분이 그 반대의 감상을 경험하게 될 거란 생각입니다.

, 희대의 악녀 가오루 미치루를 적극적으로 응원하게 되는 이상한 감상이라고 할까요?

 

다만, 가오루 미치루가 재판을 받는 마지막 챕터의 반전은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야마 시치리 식 반전의 맛이 충분히 살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초반부에 이 반전의 트릭을 눈치 챌 수도 있는데,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대목이 등장하면 곰곰이 이후의 전개를 예측해보기 바랍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이후 가오루 미치루가 주인공인 후속편(‘또다시 비웃는 숙녀’)은 물론,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한 인물과 미치루가 2인조로 활약하는 작품도 출간한다고 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에 대한 피로도가 극에 달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시리즈는 몰라도 이 두 작품만큼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큼 희대의 악녀 가오루 미치루에게 저도 푹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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