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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손을 보다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2011년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를 읽고 구보 미스미의 팬이 됐고,
이후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밤의 팽창’까지 매번 인상적인 책읽기를 경험했습니다.
‘가만히 손을 보다’는 (한국에서) 전작 이후 4년 만에 출간된 작품인데,
늘 그랬듯, 주변에 산재한 것 같지만 실은 무척이나 내밀하고 미묘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녀만의 날것 같은 시각으로 농밀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네 명의 주인공은 사랑, 관계, 소통, 자기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어쩌면 극과 극이라 할 정도로 다른 생각과 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사랑을 향해 자신을 던진 여자, 사랑을 지키려는 남자,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여자, 자기조차 사랑할 수 없는 남자‘로 구분해놓았는데,
일부 공감 가는 경우도 있지만, 딱 이렇게만 정형화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무심해 보이기도, 무미건조해 보이기도 하지만 본능이 이끄는대로 사랑에 빠져드는 히나,
그런 히나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지만 타인과의 사랑보다는 자기애에 더 충실한 미야자와,
히나가 미야자와와 관계를 맺은 뒤에도 계속 그녀 주변을 맴도는 가이토,
사랑보다는 쾌락에 몸을 맡겨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가이토의 곁에 머물기로 한 하타나카.
이들은 몇 년의 시간을 두고 서로 엇갈리거나 상대를 바꿔가며 관계를 맺는데,
때론 본능에 충실한 채, 때론 이성에 억눌린 채 자신의 삶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곤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은 ‘자기애’입니다.
그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지독한 이기심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또 달리 보면 엉망이 돼버린 자신에 대한 측은함으로 보이기도 해서 더 애틋함을 발산합니다.
더불어, 구보 미스미 특유의 집요하고 촉촉한 성애 묘사가 이번 작품에서도 돋보였는데,
야하거나 상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몸으로 나누는 진심 어린 대화로 읽히는 것은
그녀의 데뷔작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이후 매번 비슷하게 겪는 특별한 경험입니다.
(너무 적나라한 나머지) 독자에 따라 성애 묘사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 부분이야말로 구보 미스미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이란 생각입니다.
다만, 앞서 읽은 세 편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작품은 다소 심심한 것은 물론
네 인물의 관계가 조금은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산만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관계의 색깔도 모호하고,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도 왠지 인공미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또, 관계보다는 사랑에 더 주력한 서사도 실망스러웠는데,
앞선 작품들의 매력이 ‘일그러졌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는 관계’에서 비롯됐던 만큼
그런 이야기가 (좀더 비극적이거나 파국을 향해 치닫는 느낌으로) 전개되길 바랐는데,
왠지 이번 주인공들은 오롯이 사랑에 주력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작들만큼 짙고 깊은 여운까진 아니었지만 구보 미스미 특유의 독특한 향기와 맛은 여전했고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그녀의 신간 소식이 언제쯤이나 들려올지 기다리는 마음이 듭니다.
알라딘에서 해외원서를 찾아보니 아직 국내에 소개 안 된 작품들이 꽤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작품이라도 좋으니 신간 소식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