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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평점 :
2013년 가을에 읽은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이후 내내 ‘도조 겐야 시리즈’의 신작을 기다렸는데, 의외로 1945년 패전 이후를 무대로 모토로이 하야타라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새로운 시리즈가 먼저 국내에 출간됐습니다. 작품 제목이 눈에 익어 예전(2017년 8월)에 쓴 ‘괴담의 테이프’ 서평을 찾아보니 이 작품은 물론 새로운 ‘도조 겐야 시리즈’에 대해 써놓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미쓰다 신조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차기작을 언급하곤 하는데, ‘괴담의 테이프’에서는 애초 ‘도조 겐야 시리즈’로 기획됐다가 스탠드얼론으로 급선회한 ‘검은 얼굴의 여우’라는 작품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2015년에 출간된 ‘괴담의 집’에서도 자주 언급된 도조 겐야 시리즈 신작 ‘유녀(幽女)처럼 원망하는 것’이 아직까지 국내에 출간되지 않아서 무척 아쉽지만, ‘유녀처럼~’이든 ‘검은 얼굴의 여우’든 하루 빨리 신작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이왕이면 이 작품이 ‘도조 겐야 시리즈’로 출간됐더라면 좋았겠지만, 다 읽고 생각해보니 특정한 시대적 배경과 인물 설정이 필수라 도저히 ‘도조 겐야 시리즈’로는 출간될 수 없었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패전 직후, 절망감에 빠진 청년 모토로이 하야타는 직장을 그만두고 방랑길에 오릅니다. 무작정 길을 떠난 그는 기타규슈의 한 작은 역에 무작정 내리는데, 그곳에서 운명처럼 아이자토 미노루라는 남자를 만나 탄광에서 일하게 됩니다. 거칠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막장에서 석탄을 캐며 다소 무모한 날들을 보내던 하야타는 어느 날 낙반사고로 멘토나 다름없던 아이자토 미노루를 잃습니다. 하지만 슬퍼할 틈도 없이 광부들의 주거지에서 연이은 변사체가 발견되고 탄광에서 전해 내려오는 괴담 속의 검은 얼굴의 여우의 소행이라는 소문까지 떠돌자 자기도 모르게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골몰하게 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도조 겐야 시리즈’에 비해 호러보다는 미스터리 성격이 강하고, 미스터리 중에서도 시대적 배경을 중요시 삼은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특히 식민지배에 혈안이 된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과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참상이 이야기의 주된 배경으로 그려졌는데 그래서인지 무척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다소 아쉬움이 남았던 게 사실입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나 ‘노조키메’에 버금가는 ‘미쓰다 신조 표 호러’를 기대했지만 사실 호러의 색깔은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일본 각지의 탄광에서 전해 내려오는 검은 얼굴의 여우 괴담은 잠깐잠깐 소개되는 양념 정도에 그쳤고 그다지 오싹한 맛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그럼 미스터리라도 짜릿했어야 하는데 그 역시 다소 맥이 빠진 느낌이라 새로운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가 앞으로 제대로 힘을 받게 될지 의문이 든 게 사실입니다. 다음 작품은 부디 소름 돋는 호러의 기운이 왕성하길 바랄 뿐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다음 작품의 제목은 ‘백마의 탑’으로, 모토로이 하야타가 탄광을 떠나 어촌마을로 흘러들어가 겪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작품 말미에 보면 모토로이 하야타가 일명 메아리 살인사건에 휘말린다고 예고하는데, 그게 ‘백마의 탑’에 등장하는 어촌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에서 출간된 ‘도조 겐야 시리즈’가 마저 국내에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인데,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이 출간된 게 벌써 7년 전인 걸 보면 신작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만 남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