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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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으로 떠들썩했던 여름,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라 불렸던 비극이 벌어지고,

이 사건을 둘러싼 모든 인물의 삶이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세 여성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 작품은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 어떤 파장을 남기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며

삶의 의미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그동안 읽은 여러 문학상 수상집에서 한번쯤은 만나봤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렇게 단독 장편소설로 권여선을 만난 건 처음입니다.

미스터리 서사가 깔려 있긴 해도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라는 건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긴 게 사실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쯤은 만족, 반쯤은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지척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엉망진창이 됐거나 또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버린

몇몇 사람들의 오랜, 그리고 고통스런 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누가 범인?’이라는 미스터리가 내내 독자의 궁금증을 상기시키긴 하지만

작가의 방점은 살아남은 자들의 혼란과 방황과 죄책감 또는 무력감에 찍혀 있습니다.

 

딸이 살해된 뒤 엄마는 굳이 딸의 이름을 태명으로 바꾸려 애쓰지만 무위로 돌아갑니다.

언니가 살해된 뒤 동생은 견딜 수 없는 압박감에 언니의 모습으로 성형을 합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갑자기 언니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어 관련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용의자였던 또래 고교생은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사건과는 무관하게 비참한 삶을 삽니다.

또 다른 용의자였던 고교생과 결혼한 여자는 시간이 흘러도 사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며 자기도 모를 소리를 횡설수설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들 누구에게도 후련하고 깔끔한 엔딩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상투적인 비극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이야기가 끝났다는 느낌보다는

앞으로 이 인물들은 언제까지든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겠다는,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소설속에서 계속 살아가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다언의 삶이 끝난 후에도 끝없이 계속 될 것이다.

끔직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p190)

 

사적 복수나 무한정 무거운 참회록에 비해 훨씬 더 현실감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억지스러운 엔딩이 아니어서 더 좋기도 했습니다.

다만, 좀 어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특별히 멋을 부린 건 아닌데, 각 인물마다 어떤 감정으로 이입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고,

특히 살해된 자의 동생인 다언의 행동과 감정의 변화는 난해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려움을 해소하고 싶어서 후기에 실린 작가의 말을 얼른 펼쳐봤는데,

거기에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들만 실려 있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고민하고 생각할 확실한 여지를 남겼다면 꽤 긴 여운을 만끽했을 작품인데,

결국엔 ‘So what?’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함만 남았고,

다 읽고도 화자 가운데 (시간이 흘러도 다들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은 들어도)

어느 누구의 소설 뒤의 삶도 딱히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 될 것 같은 기대를 가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무리 과정이 너무 관념적이거나 현학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작품일수록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 무척 궁금해지는데,

조만간 인터넷 서점이나 카페를 통해 레몬에 대한 후기를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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