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러브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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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지망생 칸나가 유명 화가인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다.

임상심리사 유키는 이 사건을 책으로 내자는 의뢰를 받곤, 그녀를 면회하고 주변을 탐문한다.

유키는 칸나의 변호인이 시동생이자 오래전 특별한 사이였던 가쇼라는 걸 알곤 당황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그와 함께 칸나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칸나의 진술은 매번 모호하고, 어머니와 친구들은 그녀를 허언증 환자라고 단언한다.

유키는 사건의 동기를 밝히기 위해 칸나의 성장 과정을 알아내는데 몰두하고,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자신의 과거가 오버랩되는 것을 발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여러 장르가 혼재된 듯한 작품입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칸나의 동기와 살의를 추적하고 재판 과정까지 그린 미스터리가 기본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유년기에 당한 직간접적 학대의 후유증과 상처를 그린 심리소설이기도 하고

또 세 남녀(그것도 형 부부와 시동생 사이)의 미묘하게 뒤엉킨 애증도 다루고 있습니다.

 

임상심리사 유키가 칸나의 주변 인물들과 과거사를 취재하는 과정은 다소 느리고 답답합니다.

당사자인 칸나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답변만 거듭하고 있고,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칸나에 대해 너무나도 상이한 진술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단서에서부터 끈질기게 앞길을 찾던 유키가

칸나가 초등학생 시절에 겪은 학대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급물살을 탑니다.

물론 일반적인 미스터리처럼 명쾌하고 선명한 전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학대 자체가 직접적인 경우도, 간접적인 경우도 있는데다 학대의 주체도 명확하지 않아서

이 대목부터는 심리소설 같은 모호한 분위기가 더 짙어지기도 합니다.

 

칸나가 왜 아버지를 살해했나? 의도적인 살인이 맞나? 무엇이 살인의 발화점인가?’

아버지를 죽인 칸나의 미스터리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10여년 전부터 이어진 임상심리사 유키와 변호사 가쇼의 특별한 관계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깊은 상처로 인해 함부로 몸과 마음을 굴리던 유키는

자신과 닮은꼴인 가쇼를 만나면서부터 갑작스런 변화를 겪게 되지만,

지독히도 냉소적이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가쇼에게 도리어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그의 형 가몬을 만나 결혼에 이릅니다.

형수-시동생의 관계로 10여 년을 살아오면서도 두 사람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한 적 없지만

우연히도 칸나의 사건에 함께 연루되면서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사실, 읽는 내내 무거운 돌 하나가 가슴 한쪽에 놓인 듯 편치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주요 인물 대부분이 가장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수시로 자신의 숙주를 괴롭혀왔습니다.

직간접적인 성적 학대는 물론 함부로 다뤄지거나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등

그들이 겪은 상처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 결과가 비참하기는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입니다.

미스터리의 당사자인 칸나도, 임상심리사가 된 유키도, 유키에게 상처를 준 가쇼도

어떻게 보면 상처에 관한 한 일란성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칸나의 재판 시퀀스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독자에게 씁쓸한 여운을 남길 것만 같았고,

역시나 예상대로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상처와 치유 등 그 어느 것도 경계가 불분명한,

하지만 그래서 현실감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드는 엔딩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깔끔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좀 답답하게 읽힐 것이고,

심리묘사가 강조된 묵직한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인상적인 책읽기가 될 작품입니다.

또 독자에 따라 아버지를 죽인 칸나의 이야기에 이입될 수도,

칸나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직시하게 된 유키와 가쇼의 이야기에 이입될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 됐든 사건보다는 심리에 집중해야 진가를 맛볼 수 있기 때문에,

행간까지 꼼꼼히 읽어가며 아주 천천히 책장을 넘겨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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