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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1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19년 3월
평점 :
마치다 히로시는 18살이 되도록 호적 없이 살아온 남자입니다. 쓰레기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호적에 오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가출한 마치다는 우연히 무로이라는 남자의 눈에 띄어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활동합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 때문에 소년원에 들어가게 됐고, 엄청난 지능과 뛰어난 기억력을 발휘하여 원생과 교도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소년원을 나온 후에는 담당 교도관이던 나이토의 소개로 조그마한 기계 공장에서 일하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러 사람과 인연을 맺습니다. 한편, 무로이는 소년원에 들어간 뒤로 자신에게 등을 돌린 마치다를 되찾기 위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온갖 전략을 구사합니다. 무로이의 집착은 알게 모르게 마치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온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살인, 배신, 방화 등 크고 작은 비극들을 일으키기에 이릅니다.
꽤 오래 전, 데뷔작인 ‘천사의 나이프’로 야쿠마루 가쿠를 처음 만난 이후 ‘하드 럭’, ‘악당’, ‘기다렸던 복수의 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읽었습니다. 꾸미지 않은 수수한 문장들로 채워져 있지만 주제, 서사, 인물 모두 안타까운 비극 그 자체라서 매번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마음 한쪽에 멍이 든 것처럼 스산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신의 아이’는 전작들과 비교하면 분량 자체도 엄청나지만, 어딘가 판타지 같은 느낌이 살짝 배어 있어서 색다른 책읽기를 경험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마치다 히로시와 그의 대척점에 있는 무로이라는 남자가 일반인과는 많이 다른, 그러니까 천재적 지능을 지녔지만 감정 같은 건 애초 없었던 것 같은, 그래서 사람들과 섞이는 것도, 그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도 거부하는 인물들이라 어딘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닌 듯한 신비한 캐릭터로 보였다는 뜻입니다.
1~2권 합쳐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걸맞게 이야기도 복잡하고 인물도 많습니다. 서사 역시 한편으론 비밀과 진실을 찾는 미스터리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로봇’ 같기만 하던 마치다가 인간미를 갖춰가는 성장소설로 보이기도 합니다. 꽤 부담스러운 분량이긴 하지만, 마치다와 무로이에 얽힌 비밀들을 쫓아가는 미스터리도 흥미롭고, 마치다의 성장과 변화를 묘사한 챕터들은 따뜻함과 위화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안에도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이한 건, 마치다와 무로이라는 뚜렷한 주인공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의 역할은 주로 그 주변인물들이 맡았다는 점입니다. 교도관 시절, 마치다에게 농락당하기도 했고, 그의 양면성에 놀라기도 했던 것은 물론 교도관을 그만 둔 뒤에는 마치다와 무로이의 비밀을 캐는 역할을 맡은 나이토, 한때 마치다를 증오했지만 결국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 가에데, 마치다와는 극과 극의 성격이지만 우연한 인연으로 인해 동료가 된 재벌가 아들 다메이, 그리고 마치다와 무로이 사이에서 위험한 미션을 맡은 아마미야 등이 그들입니다. 사실, 마치다와 무로이는 주인공임에도 스스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말이 많아도 안 되고, (독자에게라도) 속내를 밝혀서도 안 되게끔 설정됐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주변 인물들이 마치다와 무로이를 대하면서 겪는 혼란과 의문들을 읽으면서 두 주인공에 대해 좀더 깊이 알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전작들과 달리 ‘신의 아이’의 엔딩은 제법 따뜻합니다. 물론 마냥 따뜻한 건 아니고, 그만큼의 비극이 병행되는 안타깝고 특별한 따뜻함입니다. 출생과 성장 모두 불행했던 마치다가 천재적인 지능 때문에 무로이라는 남자를 만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속에 빠졌다가 이후 운명처럼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성장하고 진화하는 이야기를 다룬 ‘신의 아이’는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비극과 따뜻함을 겸비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굳이 아쉬움을 꼽자면, 일부 사족처럼 보이는 조연들과 그들이 차지한 적잖은 분량이 과해 보였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은 다소 급한데다 작위적인 느낌까지 들게 했다는 점입니다. 늘 막판에 ‘몰아치는 충격’을 맛볼 수 있었던 야쿠마루 가쿠의 전작과 비교해보면 안정적이면서도 주제를 강조하는 듯한 TV 주말연속극의 마지막 회 같은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1천 페이지에 걸쳐 차곡차곡 쌓인 서사의 힘은 그 아쉬움을 충분히 덮을 만했고, 야쿠마루 가쿠의 팬이라면 마치다와 무로이의 이야기를 한껏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거의 1년에 한 편 꼴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이 출간되고 있는데, 가능하다면 올해 안에 그의 신작을 한 편 정도 더 만나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진가가 발휘됐던 ‘사적 복수’나 ‘누명 벗기’를 다룬 작품이라면 더더욱 환영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