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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이브 - 코드네임 빌라넬
루크 제닝스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평점 :
‘최악의 사이코패스이자 최고의 킬러’ 대 ‘최적의 요원이자 최선의 추적자’라는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는 킬러와 그를 추적하는 요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흔치 않게 킬러(빌라넬)와 요원(이브) 모두 여성 캐릭터로 설정됐는데,
특히 제목 자체가 ‘킬링 이브’라는 점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러시아 폭력조직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수감된 옥사나는
교도소를 찾아온 의문의 사내에게 스카웃된 뒤 빌라넬이라는 이름의 킬러로 변신합니다.
소위 ‘12사도’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의 지시에 따라 무자비하게 암살을 수행하는 빌라넬은
살인과 양성애 섹스를 통해 쾌감을 만끽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사이코패스 킬러입니다.
한편, 정보국 요원이긴 하지만 실은 사무직에 가까운 ‘경호 리스트 작성자’였던 이브는
런던 한복판에서 벌어진 러시아 정치인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나름 충실하게 유지해온 정보국에서의 지위가 밑바닥부터 흔들릴 위기에 처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암살자 추격을 지시 받은 이브는 단지 ‘암살자가 여자’라는 단서에서 출발하여
전 세계에서 발생한 주요 암살 사건을 추적하던 중 빌라넬의 흔적을 찾아냅니다.
일단 돌직구 같은 캐릭터와 스토리 때문에 페이지는 빛의 속도로 넘어갑니다.
3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분량이라 페이지 넘기는 게 아까울 정도인데,
이 얘기를 뒤집어 말하면, 아슬아슬한 긴장감이나 예상치 못한 반전 등
액션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다소 떨어진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빌라넬의 암살은 (매번 결코 쉬운 상황들은 아니지만) 너무 쉽게 성공합니다.
미션에 따라 신분을 바꾸고, 현장에 잠입하고, 순식간에 상대를 제거하는 모든 과정이
“이렇게 쉬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반 이후까지 반복됩니다.
물론 그녀에게도 위기는 찾아오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눈치 챈 자들과 조우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녀는 ‘너무 완벽한 킬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브의 경우, 애초 사무직에 가까운 정보요원에서 본격적인 추적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그 과정 역시 대체로 무난하고, 상투적이고, 어찌 보면 다소 비현실적입니다.
남편과 평범한 가정을 이룬 채 좀더 큰집에 살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캐릭터지만
느닷없이 ‘믿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부로부터 희대의 킬러를 추적하라는 지시를 받는데,
아무래도 우여곡절이라든가 극적인 포인트가 없어서 쉽게 이입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물론 ‘킬러와 요원’이 등장하는 액션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충분히 갖춘 작품입니다.
빌라넬의 과거(킬러로 변신하는 과정)와 현재(엄청난 미션 수행 능력)는 재미있게 읽히고,
거침없이 질주하던 빌라넬이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이하는 변곡점도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빌라넬과 정체불명의 조직에 대해 이브가 조금씩 다가가는 대목은
(어쨌든 좀 쉬워 보이긴 해도) 나름 진정성이 엿보여서 이후의 전개를 궁금하게 만듭니다.
또, 잔혹한 폭력 묘사에 못잖은 수위 높은 선정성은 때론 과도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절대 평범한 인물이 아닌 빌라넬의 캐릭터를 탄탄하게 만드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당황스러웠던 건, 설정만 놓고 보면 분권을 해도 충분할 정도의 방대한 서사인데
이렇게 짧은 분량 안에 이야기가 마무리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점입니다.
거의 마지막 장에 이를 즈음에야 이야기가 완결되는 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시즌 1’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게 됐는데,
아쉬운 점이라면 애초 작품 소개에 이런 사실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미드나 일드를 한 번에 몰아보는 취향인 저로서는 마지막 장을 덮기가 무척 아쉬웠는데,
영국에서 이 작품의 후속작이 출간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빌라넬과 이브가 본격 대결을 펼칠 다음 이야기가 조만간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