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블러디 프로젝트 - 로더릭 맥레이 사건 문서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조영학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평점 :
꽤 잔혹한 이야기를 다룬 것 같은 분위기의 제목과 달리
‘블러디 프로젝트’는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이면서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로더릭 맥레이 사건 문서’라는 부제 역시 이 작품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869년 스코틀랜드의 한 소작지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사건이 메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목격자들의 진술, 범인 스스로 범행을 자술한 비망록, 범죄인류학자의 정신감정 보고서,
그리고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과 증인들의 증언을 담은 재판일지 등으로 구성돼있어서
비밀과 추리와 반전이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범죄소설로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번역하신 조영학 님도 ‘옮긴이의 말’에서,
“곧바로 범인이 자수하며, 범인이 바뀔 정도의 갈등이나 반전은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처음 번역 작업을 한 후 당황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응? 왜 이렇게 밋밋하지?’”, 라며
이 작품에 대한 첫인상을 서술할 정도였습니다.
지주와 마름과 소작인이라는 계급이 존재하던 1869년의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컬두이.
아홉 가구에 55명밖에 살지 않는 이 작고 빈곤한 마을에 살던 17살 소년 로더릭 맥레이는
부당한 완장질을 휘두르며 자신의 가족들을 괴롭히던 라클런 매켄지 일가를 살해합니다.
체포 직후 범행을 자인한 그는 변호사의 권유로 사건 관련 이야기를 비망록으로 작성합니다.
한편, 변호사는 맥레이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그를 위해 범죄인류학의 권위자까지 초빙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정작 맥레이는 재판정에서마저 특별히 선처를 바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고백하자면, 중반쯤 이르렀을 때 이 작품이 평범한 범죄소설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즉, 비밀과 반전과는 무관한 ‘보고서’ 같은 이야기라는 확신이 들면서
몇 번이고 중도 포기할까 고민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끄는 맥레이의 불행한 개인사 때문에 결국 끝까지 읽게 됐는데,
극빈층에 가까운 19세기 말 스코틀랜드 소작농의 비참한 삶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라든가,
지주-마름-소작인으로 이어지는 계급사회의 비정함과 잔혹함,
17살 소년의 소극적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욕망 등이 매력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역시 비밀과 반전이 없는 보고서에 가까운 소설이란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번역하신 조영학 님은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소설이다.
누가 범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범죄를 저질렀으며,
맥레이를 비롯해 어느 증인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가 소설의 핵심.”이라고 변호(?)하셨지만,
‘왜?’는 그다지 신선하거나 충격적이지 않았고,
‘누구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역시 단선적인 묘사에 그친 탓에
이 작품만의 미덕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크게 보면 두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성장기와 범행 전후의 정황을 고백한 맥레이의 비망록이고,
또 하나는 맥레이의 정신적 이상을 입증하려는 변호사의 고군분투기입니다.
하지만 범인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고 있고,
변호사는 범인과 특별한 관계도 아니고 범인의 정신적 이상을 확신하는 것도 아닌데다,
대중들의 시선을 끈 이 사건을 통해 변호사로서 성공하겠다는 욕망을 지닌 것도 아니다 보니
두 개의 이야기가 아무런 접점 없이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밖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2016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로 지명된 것은 물론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걸 보면 특별한 미덕이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대중적인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선
(번역자와 마찬가지로) 다소 당혹스런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꽤 호불호가 갈릴 이 작품에 대해 다른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척 궁금한데,
그래서인지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의 서평을 꼭 찾아보고 싶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