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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탕 내리는 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2000년대 초반, ‘웨하스 의자’, ‘반짝반짝 빛나는’,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등 에쿠니 가오리의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들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의 신간 소식이 들려오면 “이번엔 어떤 사람들의 어떤 관계들이 그려질까?”, 또, “어떤 형태로 일그러지고 비틀린 출구 없는 감정들이 그려질까?” 기대하곤 했습니다.
‘별사탕 내리는 밤’은 크게 보면 두 자매의 이야기, 좀더 나눠보면 여섯 남녀의 이야기인데, 에쿠니 가오리의 그 어느 작품들보다 파격적이고 센 설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에쿠니 가오리는 간결하고 평범한 문장들로 그 독한 설정들을 직조했는데, 덕분에 역설적으로 사랑, 욕망, 회한, 질투 등 다양한 감정 덩어리들의 폭발력은 더 강력했고 다 읽은 뒤의 여운 역시 아주 긴 꼬리를 물고 기억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사와코와 미카엘라는 아르헨티나의 일본인 거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매입니다. 어릴 적부터 남자마저 공유할 정도로 일심동체 같던 그녀들이었지만, 일본 유학 중 알게 된 남자 다쓰야 때문에 갈라섭니다. ‘다쓰야의 공유’를 거부한 사와코가 그와 결혼 후 일본에 자리 잡은 반면, 두 사람에게 분노한 미카엘라는 스무 살의 나이에 임신한 채로 아르헨티나로 돌아갑니다.
결혼 10년이 된 해, 사와코는 연극 같았던 삶을 정리합니다. 다쓰야에게 이혼을 통보하곤 아내와 아들을 버린 남자 다부치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떠납니다. 사와코를 찾아 아르헨티나에 온 다쓰야는 처제인 미카엘라의 도움을 받아 사와코를 만나지만 예상치 못한 사와코의 반응에 혼란을 느낍니다. 더불어, 여전히 자신을 ‘형부 이상의 존재’로 여기는 미카엘라로부터 상상도 못했던 비밀 이야기를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에쿠니 가오리가 그리는 상식 밖의 인물과 감정들을 비현실적이라 여기거나 심지어는 아주 불쾌하게 여기는 독자를 종종 목격한 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실 속에는 그런 인물과 감정들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고, 그래서 그녀의 작품이 리얼하고, 애틋하고, 가슴 한쪽을 콕콕 찌르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현실에는 사와코, 미카엘라, 다쓰야 같은 인물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고, 그들이 품고 있는 감정들 역시 너무나 내밀한 나머지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실은 많은 사람들이 닮거나 엇비슷한 형태로라도 품어봤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사와코라면, 미카엘라라면, 다쓰야라면...” 이런 식으로 인물 하나하나에 깊숙이 이입하다 보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크든 작든 위화감이 들던 감정들이 점차 익숙해지거나 내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들이 한 어떤 행동들도 쉽사리 비난하거나 틀리다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캐릭터마다 이입의 깊이나 농도는 전혀 다르지만, 결국엔 ‘마음이 하는 일’이란 타인은 물론 자신도 통제하기 힘들기에,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안쓰럽고 애틋하게 여겨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다만, ‘별사탕 내리는 밤’은 ‘리얼+애틋+공감’이란 기준에서 그녀의 초기 수작들과 비교하면 다소 아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게 솔직한 소감입니다. 여기저기서 옅긴 해도 인공미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애초 하나였던 몸과 마음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눠놓은 듯한 두 자매의 캐릭터, 지극히 쿨하고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판타지 속 남주 캐릭터 같던 다쓰야와 다부치,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계된 듯한 미카엘라의 10대 딸 아젤렌과 50대 파쿤도의 불륜은 초기 수작들 속의 소름 돋을 듯한 리얼리티에는 못 미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에서 동어반복, 자기복제가 느껴진 탓에 꽤 오랜 공백을 뒀는데 이 작품 역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어도 그녀의 ‘전공’을 오랜만에 제대로 맛본 느낌이라 대체로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읽는 동안 문득문득 그녀의 초기 수작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인공미라곤 찾아볼 수 없던, 갑작스레 울컥하게 만들곤 했던 그 작품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어떤 느낌을 줄지 사뭇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