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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방 ㅣ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3
다니자키 준이치로 외 지음, 김효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일본 초창기 추리소설을 맛볼 수 있는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가운데 세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단발머리 소녀’를 무척 흥미롭게 읽어서 연이어 찾게 됐는데,
이 작품은 다이쇼 시대, 그러니까 20세기 초반에 집필된 아홉 편의 단편을 수록했습니다.
특히 탐미주의와 그로테스크한 문체로 유명한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일본의 유명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낳게 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이 수록돼서
호기심과 기대감이 전작에 비해 남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표제작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살인의 방’만 100여 페이지 분량이고,
나머지 여덟 작품은 엽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짧은 20~30페이지 분량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나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괴담의 분위기와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살인의 방’,
우연과 필연의 아이러니를 속사포 같은 대화로 풀어가는 ‘길 위에서’,
다분히 신파적인 설정이지만 목숨을 건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는 ‘개화의 살인’,
대지진의 참극 속에 벌어진 끔찍한 살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묻는 ‘의혹’,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하는) 살인사건에 대한 제각각의 관점을 서술한 ‘덤불 속’,
그리고 피해자 유족의 고통, 국가의 느슨한 사법체계에 대한 고발을 다룬 ‘어떤 항의서’ 등
현대 일본 미스터리의 맹아기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다채로운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이번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순문학 문단에서 작가적 지위를 확보하였던 작가들이면서
동시에 탐정소설 중흥의 원조로 평가받는 작가들의 추리소설”이라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출판사의 이런 소개글과 함께
탐미주의 소설인 ‘미친 사랑’, ‘열쇠’ 등으로 만났던 다니자키 준이치로라든가
순문학 작가로 알고 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이 포함된 필진을 보곤
미스터리 서사에 대한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던 게 사실인데,
전작인 ‘단발머리 소녀’와 비교해보면 오히려 더 만족감이 높았다는 생각입니다.
100여년 전에 집필된 작품들이다 보니 요즘 눈높이로 보면 단순하고 직설적일 수밖에 없지만
본격적인 추리소설 시대가 열리기 직전의 여명기를 장식한 작품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만의 미덕과 가치는 물론 거칠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맛을 지닌 작품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작품마다 편차도 다소 있었고, 좀더 세련된 작품이 수록됐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희귀한 작가와 작품들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문득 한국 추리소설의 태동기가 궁금해졌고,
이 시리즈처럼 그 태동기의 작품들을 선별한 시리즈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성도나 서사의 밀도와 무관하게 태동기의 작품만이 갖는 특별함이 있을 것 같고,
한국 추리소설의 토대를 이룬 작가들의 면면도 무척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상업적으로는 성사되기 쉽지 않겠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