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인은 지옥이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고요한숨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유치원 교사 마리는 함께 잔 남자 친구 파트릭이 피투성이인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마리에게는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 오랫동안 살인 충동 강박을 앓아왔기 때문.
증거까지 완벽한 탓에 용의자로 몰린 마리는 자백 후 치료감호소에서의 수감생활을 시작한다.
담당의사와의 면담조차 거부하던 마리는 통째로 사라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겠다고 결심하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고통스러운 강박증에 대해 담당의사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의 진실과 마주하곤 큰 충격에 빠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강박증이라는 병명에 대한 일반인의 상식은 ‘문제는 있지만 그리 위험하진 않다’ 정도입니다.
기껏해야 결벽증이나 완벽주의가 좀 심하게 발현되는 걸 뜻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강박증이 ‘급작스럽고도 근거 없는 잔혹한 살인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최근 문제 시 되는 ‘분노조절장애’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증상임을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마리의 강박증은 대체로 이런 식입니다.
대상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들(유치원 아이들, 가족, 연인)이고,
마리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그들을 잔혹하고 끔찍하게 살해하는 영상이 떠오릅니다.
문제는 마리가 ‘생각’과 ‘행동’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러다가 자신의 상상이 실제 살해로 이어질까 늘 노심초사하던 그녀는
함께 잠들었던 파트릭이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끔찍하게 살해된 걸 발견하곤
결국은 자신의 강박증이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졌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누구든 불쾌감을 안긴 상대를 ‘상상 속에서’ 마음껏 폭행하고 죽여본 경험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의 강박증은 그런 일시적인 해프닝이 아닌 것은 물론
그 대상이 유독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가장 큰 위협요소입니다.
특히 어렵게 얻은 딸을 사고로 잃고, 그 여파로 가정까지 해체된 마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상상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위험한 일입니다.
마리는 인터넷에서 동병상련을 겪는 사람들을 찾던 중 엘리라는 인물과 연결되는데,
그녀 덕분에 강박증은 현저하게 호전되기 시작하고 파트릭과의 사랑도 순조롭게 발전합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고, 결국 그녀는 끔찍하게 살해된 파트릭의 사체와 맞닥뜨리고 맙니다.
자포자기하듯 살인을 인정한 마리는 치료감호소에 수감된 뒤로도 입을 다물었지만,
담당의사인 팔켄하겐 박사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 자신의 사라진 기억을 되살리기로 합니다.
그리고 사건 이전의 자신의 삶을 디테일하게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딸 셀리아의 죽음과 해체된 가족 이야기에서 시작된 마리의 고백은
죽은 파트릭과의 첫 만남과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
그리고 베라와 펠릭스 등 파트릭 남매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까지 이어집니다.
독자 누구든 이 고백의 끝에 진실이 드러나고 진범이 밝혀질 거라 기대하게 되는데,
중반부 정도까지 주로 ‘체념에 빠진 마리의 고백’이 전개되고 있는데다
경찰이나 탐정도 없이 마리의 대화상대는 정신과 의사와 다중인격자인 동료 수감자뿐이라서
혹시 이 작품이 스릴러가 아니라 ‘강박증에 대한 픽션’인가 의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마리의 고백이 진실을 밝히는 열쇠이긴 하지만 다소 장황하게 전개됐고,
(결과적으론) 강박증 설명을 위해서만 필요했던 캐릭터들도 적잖이 등장한 탓에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살짝 지루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가장 아쉬웠던 대목은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와 계획’인데,
나름 여러 차례의 반전과 함께 드러난 충격적인 사실이긴 해도
정체와 동기는 (공감은 가지만) 현실감이 좀 떨어져보였고
범행계획은 너무 완벽하고 정교해서 오히려 작위적으로 읽혔다는 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만 보면 별 5개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굳이 1개를 뺀 이유는 결국 중반부의 약간의 지루함과 이 작위적인 느낌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