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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의 해바라기
유즈키 유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황금시간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유즈키 유코는 올해 출간된 ‘고독한 늑대의 피’를 통해 강한 인상을 받은 작가인데,
이 작품 역시 ‘2018년 서점대상 2위’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어서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우리에겐 생소한 일본 장기를 소재로 한 미스터리입니다.
일본에 7벌밖에 없는 희귀한 고가의 장기 말과 함께 발견된 암매장 사체 수사가 한 축이고,
불우한 유년기를 거쳐 천재적 장기기사로 성장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또 다른 한 축입니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작가는 ‘살인용의자=천재적 장기기사’임을 곧장 공개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00여 페이지의 본문을 통해
지난 4개월간 이뤄진 형사들의 수사과정과 천재 장기기사의 성장기를 밀도 있게 설명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보면 “마츠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을 연상시키는..”이란 대목이 있는데,
외적으로는 유년기부터 부침을 반복하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내용면에서는 대하드라마에 가까운 깊이와 무게감을 지녔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주인공에게 장기는 결코 잊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간절한 열망과도 같은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인생 내내 깊은 절망과 배신감을 떠안긴 대상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의 폭력으로 불우해진 유년기에 한줄기 빛이 돼준 것도 장기였지만,
성인이 된 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게 만든 것도 역시 장기였기 때문입니다.
다 읽고 생각해보면 그 깊이와 무게감이 어느 정도 공감되기도 했고,
디테일한 룰을 모르고 봐도 긴장감이 넘쳤던 장기 대결에 대한 묘사도 재미있었고,
중후반 이후 엔딩까지 팽팽하던 비장미 역시 매력적이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던 게 사실입니다.
‘고독한 늑대의 피’에서 형사들의 삶을 지독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린 작가의 필력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속 형사들의 이야기가 제법 궁금했지만 다소 기대에는 못 미쳤습니다.
무례하고 이기적이지만 최고의 능력을 지닌 고참 형사와 프로 장기기사를 꿈꿨던 신참 형사는
나름 캐릭터와 케미는 재미있었지만 ‘7벌의 장기 말 찾기’ 외엔 딱히 한 일이 별로 없었고,
어떻게 보면 ‘수사과정을 설명하는 내레이터’ 정도의 역할만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거친 천재 장기기사 게이스케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지만,
이 역시 초반 내내 밋밋하고 상투적인 아침연속극처럼 평범하고 장황하기만 해서
서점대상 2위를 차지한 유즈키 유코의 작품이 맞나,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게이스케가 대학에 들어간 뒤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속도감도 빨라지고
그의 삶을 뒤흔드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긴 합니다.
또, 사체의 신원이 밝혀지고, 함께 매장됐던 장기 말이 게이스케와 연관 있음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미약해 보였던 미스터리의 힘도 제대로 힘을 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오자 갑자기 ‘장기’는 사라지고 엉뚱한 설정들이 이야기 핵심을 차지하는데,
정작 어릴 적에는 별로 그리워한 적도 없는 자살한 어머니에 대한 게이스케의 회한,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을 보며 느끼는 (본인도 그 근거를 알지 못하는) 죽음에의 동경,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돈을 뜯어내는 아버지에 대한 살의에 가까운 증오심,
그리고 그 아버지로 인해 알게 된 ‘게이스케 자신도 몰랐던 과거의 비밀’ 등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이 난데없는 설정들 때문에 이 작품의 정체성이 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클라이맥스 이전의 게이스케와 이후의 게이스케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였고,
그의 고민과 갈등 자체도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앞서 전개됐던 ‘장기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두 허망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하고,
클라이맥스와 엔딩만 놓고 보면 굳이 장기라는 소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고,
장기를 잊고 사업가로 성공한 게이스케가 또다시 장기에 손을 댄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시작은 ‘장기’였지만 결말은 ‘장기와는 별 관계없는 일’로 마무리됐다고 할까요?
‘고독한 늑대의 피’ 이후 유즈키 유코의 신작을 기대했던 터라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은데,
당초 기다리던 작품인 ‘불길한 개의 눈’(‘고독한 늑대의 피’의 후속작)이 출간되면
다시 한 번 유즈키 유코의 거칠지만 매력적인 경찰 이야기를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