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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사이코스릴러의 대명사’인 작가입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장르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읽은 작품이라곤 ‘영혼파괴자’가 유일했습니다. 3년 전에 읽은 ‘영혼파괴자’가 매력적인 마중물 역할을 했다면 계속 그의 작품을 찾았겠지만, 아쉬움을 꽤 많이 느꼈던 탓에 그 뒤로는 제바스티안 피체크를 잊고 지냈는데, 한 줄의 카피 -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굴 선택하겠는가?” - 때문에 다시 한 번 그의 사이코스릴러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독일의 한 인터넷사이트에서 살인복권을 발행합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과 함께 단돈 10유로만 낸 뒤 당첨이 되면 그 ‘사람’은 만인의 표적이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인터넷사이트에서 그 ‘사람’을 사냥한 자에게 무려 천만유로의 상금을 내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월 8일 밤 8시, 메인 사냥감과 예비 사냥감 두 명의 이름이 공개됩니다. 한 명은 유명 밴드의 드러머였지만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인 베냐민 뤼만이고, 또 한명은 심리학을 전공한 여대생 아레추 헤르츠슈프룽입니다. 사냥꾼들에게 허용된 자유로운 살인 시한은 12시간. 두 사람은 천만유로에 눈이 먼 불특정다수의 사냥꾼들은 물론 오로지 폭력의 맛에 취한 사이코패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악몽의 12시간을 보냅니다.
제도와 관습에 의해 억눌렸던 인간들의 쾌락적 폭력성과 가학적인 파괴성은 인터넷과 유튜브라는 기폭제 덕분에 통제 불능의 망나니가 돼버렸고, 우리는 그 망나니가 수시로 저지르는 어이없는 비극들을 지켜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살인복권을 발행하고 상식 밖의 살인극을 설계한 ‘오즈’라는 인물은 어쩌면 더 이상 특이하거나 돌연변이 같은 캐릭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즈’는 마치 게임을 설계하듯 살인복권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의지대로 게임이 전개되지 않거나 게임을 방해하는 자에게 거침없이 철퇴를 내립니다.
‘오즈’의 게임에 갇힌 베냐민과 아레추는 그야말로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기는데, “정부에게 12시간 동안 합법적 살인을 보장받았다.”는 ‘오즈’의 가짜뉴스에 현혹된 사냥꾼들은 두 사람이 도망치는 곳마다 나타나 천만유로의 대박을 꿈꾸며 광기 어린 폭력을 휘두릅니다. 또, 잔혹한 폭력장면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돈을 버는 사이코패스는 그들의 가족까지 위협하며 두 사람을 막장까지 몰아갑니다.
이렇듯, 설계자-도망자-추격자들이 벌인 12시간의 피비린내 나는 게임은 새벽녘 핵심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인터넷과 유튜브의 광기에 지배당한 사냥꾼들의 기행은 적잖은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베냐민과 아레추의 생존을 위한 싸움 역시 해피하지도, 새드하지도 않은 엔딩을 맞이합니다.
사실, 읽는 내내 100m를 전력 질주하는 듯 호흡이 가빠지는 경험을 했는데, 그건 이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 엄청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액션영화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베냐민과 아레추는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연이어 새로운 위기에 빠지고, 두 사람을 추격하는 사냥꾼과 사이코패스들은 한시도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덕분에 45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한나절 만에 완독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속도감과 긴장감만 놓고 보면 꽤 매력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이해하기 힘든 막판 반전 때문에 맥이 확 빠졌다는 점입니다.
‘영혼파괴자’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한 탓에 실망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는데, 앞서 쌓아온 탄탄한 서사와 숨 가쁘게 몰아친 사건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막판에 드러난 진실은 너무 안이하고 실망스럽게 설정됐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충분히 납득하거나 매력적인 반전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제바스티안 피체크와 궁합이 잘 안 맞는 게 아닌가, 라는 회의를 다시 한 번 느끼게끔 만든 대목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딱 한 편만 더 읽게 된다면 아마도 가장 많이 알려진 ‘눈알수집가’일 것 같은데
그 작품을 통해서라도 ‘사이코스릴러의 대명사’의 매력을 맛볼 수 있다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