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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이치카와 유토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11월
평점 :
소형 비행선 젤리피시의 비행 성능을 시험하던 중 선내에서 멤버 한 명이 시체로 발견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 항행 시스템이 망가져 젤리피시는 설산에 갇힌다.
이윽고 희생자는 하나둘 늘어가고 생존자들은 서로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구조대의 손길이 요원한 가운데 기묘한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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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상상력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SF물이라 할 수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70~1983년, 그러니까 꽤 오랜 과거입니다.
또, ‘밀실’과 ‘복수’라는 코드까지 버무려져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제26회 아유카와 데쓰야상 수상작이라는 이력에 못잖게 시선을 끄는 건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케 하는 플롯을 차용한 점인데,
희생자 전원이 밀폐된 공간에서 타살됐다는 점에서 내부 범인설도 불가능하고,
사건의 무대인 젤리피시가 외부에서의 침입이 100% 불가능한 구조인 탓에
누구도 쉽게 입증할 수 없는 연쇄살인 미스터리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작가는 ‘막간’이라는 챕터들을 통해 범인의 1인칭 서술을 중간중간 노출하는데,
그의 정체와 범행동기, 그리고 범행 방법을 딱 감질날 정도로만 설명하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이 점은 사건을 수사하는 마리아&렌 콤비의 캐릭터입니다.
마리아는 ‘평소 말과 행동에 분별이 없고 생활 능력도 빵점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서른 언저리에 경감에 오를 정도로 날카로운 분석력과 추리력을 자랑합니다.
반면 동양인 형사 렌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완벽한 정장 차림에 냉정하고 시니컬한 언사로
상사인 마리아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매력남입니다.
외모나 성격 모두 이질적이지만 두 사람은 진지한 수사과정에서도, 코믹한 일상에서도
최고의 시너지를 내는 명콤비처럼 보입니다.
다만, 미스터리 자체의 힘은 다소 아쉬움이 컸던 작품입니다.
초중반까지만 해도 궁금증과 기대감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후반부에 와서 급격하게 맥이 빠졌다고 할까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는 언급할 수 없지만,
‘밀실’도, ‘복수’도, ‘SF’도 대부분 결과론적인 변명으로 일관하는 느낌이었는데,
바꿔 말하면, 범행방법과 동기,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 모두 설득력이 약했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계획 자체가 가능할까? 계획이야 가능하다 해도 실현 가능성이 1%나 될까?
그런데 그 1%의 가능성이 어쩐지 현실감이라곤 거의 없는 방식으로 실현된 건 아닐까?
특히 사건의 무대인 ‘밀실’에 관한 한 작가가 ‘반칙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다른 의견들이 분분할 수 있을 것 같아
기회가 되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더불어, 작가가 나름대로 ‘과학적 지식’을 최대한 쉽게 풀어쓰려고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물리, 화학, 항공공학에 관한 서술이 적잖이 포함돼있다 보니
저 같은 ‘순도 100% 문과생’에게는 간혹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명작에 대한 오마주, 과거를 무대로 한 SF, 흥미로운 주인공 캐릭터 등
여러 가지 미덕과 장점을 지닌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설득력 없는 반전과 그에 대한 장황한 변명이 초중반의 매력을 감소시킨 탓에
개인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1/3까지만 해도 별 5개를 줄 생각이었지만, 절반쯤 읽었을 때 4.5개로 줄었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와선 결국 4개로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소개글을 보니 마리아&렌 콤비가 활약하는 시리즈가 계속 출간됐다는데,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은 독자들의 반응을 지켜본 뒤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