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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 / 스핑크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특이한 제목과 표지만큼이나 기발한 발상과 독특한 이야기를 지닌 작품입니다.
‘기적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트릭이 성립하지 않음을 입증하려는 탐정’ 우에오로 조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당연한 보통의 탐정 주인공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걷는 인물입니다.
말하자면, 누구도 쉽게 풀지 못할 것 같은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벌어졌는데
주인공은 그것이 현실적 트릭에 의한 범행이 아니라 ‘기적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반면,
오히려 적대세력들이 ‘기적이란 없으며 100% 트릭에 의한 범행’임을 입증하려 분투(?)합니다.
앞뒤가 뒤바뀐 듯한 주인공과 적대세력의 설정도 흥미롭지만
다양한 장르적 특징을 지닌 점도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이 작품의 장르를 굳이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논리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릭에 의한 실제 사건’임을 주장하는 적대세력과 ‘기적에 의한 결과’를 주장하는 우에오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 그대로 논리와 추론의 성찬 또는 전쟁을 벌이는데,
간혹 이 논리 싸움이 너무 복잡해진 나머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외에 이 작품은 판타지, 무협, 휴먼드라마로서의 미덕도 함께 지니고 있는데,
일단, 주인공 우에오로 조는 기적을 주장하는 세계관 외에도
파란 머리, (두 눈동자의 색이 다른) 오드 아이, 늘 걸치고 다니는 붉은 외투 등
현실적 인물이라기보다 판타지나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처럼 느껴집니다.
또, 차례차례 등장하여 우에오로 조와 트릭 대결을 펼치는 ‘反기적론자’들은
등장하는 모양새나 내뿜는 포스 모두 무림의 고수를 연상시키는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막판에 드러나는 사건의 진실과 우에오로 조가 기적에 연연해온 이유는
미스터리를 넘어 휴먼드라마의 향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우에오로 조가 기적을 입증하려는 사건은 10여 년 전 벌어진 신흥종교집단의 자살사건입니다.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소녀가 뒤늦게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다며 우에오로를 찾아와선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한 소년이 집단자살의 현장에서 자신을 구해낸 뒤 안전한 장소로 옮겨줬는데,
한참 후 깨어나서 살펴보니 그 소년은 머리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신흥종교집단의 거주지는 외부와 차단된 곳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럼 내가 그 소년을 죽인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 소년을 죽인 뒤 내 곁에 둔 것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그 소년이 자신을 옮길 당시 이미 머리가 잘린 상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우에오로 조는 여러 날의 조사 끝에 ‘기적’임을 선언합니다.
즉, 소녀는 범인이 아니며, 소년은 머리가 잘린 채 기적을 통해 소녀를 구했다는 얘깁니다.
우에오로 조는 달리 그 소년의 죽음을 설명할만한 트릭이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추정 가능한 모든 트릭과 그것이 실현 불가능함을 설명한 수백 장의 보고서를 내놓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에오로 조의 논리를 반박하는 ‘反기적론자’들이 하나씩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리한 트릭으로 소년의 죽음을 입증하곤 우에오로의 기적론을 반박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추리한 트릭이 개연성이 없거나 터무니없더라도
우에오로는 명확한 근거를 갖고 그 트릭이 불가능함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독특하긴 해도 사건, 캐릭터, 기적에 관한 논쟁 등 다소 생경한 코드들이 버무려진 탓에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가능성 있는 모든 트릭을 부정함으로써 기적을 입증한다’는 설정이 논란거리인데,
실제로 적대세력 중 한 명은 우에오로의 ‘기적 입증법’을 간결하게 부정해버립니다.
“모든 가능성이란 다시 말해 ‘무한’을 뜻하지. 영겁의 시간이 주어져도 다 열거할 수 없다.
즉 이 탐정의 기적을 증명하는 방법론 자체가 탁상공론, 그림의 떡인 거다.”
비록 우에오로가 수백 장에 달하는 보고서를 통해 가능한 모든 트릭을 부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한 모든 트릭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가능한 모든 트릭’을 전부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은 물론 후속작도 꽤 호평을 받은 것 같습니다.
번역하신 이연승 님 역시 이 작품의 새로운 시도와 신선한 서사를 극찬하셨는데,
개인적으로는 호불호의 딱 중간지점쯤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적을 입증하려는 주인공’ 자체가 설득력이 좀 약했던 것 같고,
우에오로를 꺾으려는 적대세력의 비현실성도 한몫 거들었다는 생각입니다.
후속작인 ‘성녀의 독배’가 ‘2017년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에 올랐다는데
이연승 님에 따르면 첫 편의 아쉬움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하니
살짝 기대와 관심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