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들의 저택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성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후지산 기슭 숲속에서 백골 시체가 발견된다.

경찰은 반년 전 실종된 고마쓰바라 준으로 추정하지만,

준의 어머니 다에코는 아들이 죽었을 리 없다고 믿으며 아들의 일생을 책으로 엮으려 한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고용되어 준의 전기를 쓰게 된 유령작가(고스트라이터) 시마자키는

날마다 고마쓰바라 저택을 방문하여 준에 대한 자료를 조사한다.

준이 자기와 같은 작가지망생이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시마자키는

준의 지인들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수상한 인물이 있음을 알아채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색깔과 톤이 너무 다양해서

서술트릭의 1인자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서술트릭의 진수인 도착 시리즈와 다양한 서술트릭의 만찬장인 단편집 그랜드맨션

그가 지닌 타이틀의 본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이지만,

그 외에도 유쾌 발랄 미스터리 단편집 일곱 개의 관이라든가

기괴한 호러 분위기를 가미한 학교 폭력과 복수에 관한 장편 침묵의 교실’,

원죄(冤罪)에 관한 돌직구 같은 미스터리 원죄자등을 보면

그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인들의 저택1993년 일본에서 출간됐고, 국내에는 2011년에야 소개된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작품들에 비하면 다소 올드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오리하라 이치의 모든 무기(?)가 총출동한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가 스스로 원죄자와 함께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라 칭한 것도,

또 평단으로부터 오리하라 미스터리의 총결산이란 극찬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외에 인터뷰, 소설 속 소설, 연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모놀로그 등

다양한 형식들이 한꺼번에 녹아있어 독특한 구성을 지닌 것은 물론

서사 역시 미스터리와 호러를 넘나들고 있어서 어떤 때는 몽환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 주요 무대이자 판타지 같은 느낌까지 주는 후지산 기슭의 깊은 숲속은

한번 발을 들이면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음험한 분위기까지 발산하고 있고,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도 호러물에 더 어울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집착 아래 성장하며 작가로서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그만큼의 광기까지 얻은 끝에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들,

사라진 아들의 죽음을 믿지 않으며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어딘가 기이한 면모의 어머니,

그 부탁을 받고 아들의 지인들을 탐문하면서 불길한 기운과 호기심을 갖게 되는 유령작가,

그 유령작가에게 노골적인 욕망을 들이대는 실종된 남자의 의붓여동생,

그 유령작가의 뒤를 밟는 듯한 미지의 키 큰 남자중년의 여자’,

그리고 전기가 완성될 무렵 유령작가에게 일어나는 의문의 폭력과 위협 등

다양하고 독특한 캐릭터가 이끄는 요약 불가 스토리500여 페이지에 걸쳐 전개됩니다.

 

다만,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이자 아쉬움은 어중간한 행동 동기와 미스터리 해법입니다.

실종된 아들, 아들의 전기를 의뢰한 어머니, 전기를 집필하는 유령작가 등 주요인물은 물론

아들의 의붓여동생, 아들의 의붓아버지, 유령작가의 부모 등 조연들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인물들의 행동 동기는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결과론적인 느낌을 줍니다.

무엇보다 호러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억지스런 행동들을 계속 벌이는데,

다 읽고 보면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이나 말을 한 건지 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미스터리 해법 역시 앞서 다양한 구성과 캐릭터를 통해 쌓아온 서사에 비하면

너무 싱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허망하게 마무리됩니다.

심지어 아직 이야기가 다 안 끝났는데도 급하게 막을 내린 듯한 인상도 받았는데,

그러다 보니 이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였나, 이 작품의 핵심 미스터리는 무엇이었나, 라는

아주 근본적인 의문까지 품게 됐습니다.

독특한 작품임에도 틀림없고, 오리하라 이치의 무기가 총출동한 작품인 것도 맞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듯한 엔딩 때문에 (심하게 말하면) 용두사미가 된 느낌을 받았고,

결론적으로는 너무 많은 걸 담으려다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오리하라 이치의 색다른 맛을 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권할 만한 작품이긴 합니다.

그를 트릭의 대가로만 알고 있는 독자에겐 정말 별미처럼 읽힐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을 보니 오리하라 이치의 최근 국내 출간작이 2015년의 일곱 개의 관입니다.

일본에서도 활동이 뜸한 건지 국내 출간이 미뤄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작품마다 강한 개성과 특별한 매력을 발휘하는 그의 신작은 언제든 환영하고 싶습니다.

아직 못 읽은 도착 시리즈일부와 () 시리즈일부부터 소화하면서

오리하라 이치의 반가운 신작 소식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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