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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ㅣ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요 네스뵈의 두툼한 분량에 꽤 익숙한 편임에도 727페이지의 무게감은 남달랐습니다. 더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사실까지 더해져서 첫 페이지를 열기도 전에 이미 분량과 서사에 압도되다시피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를 언제 읽었는지, 제대로 읽긴 했는지조차 불분명한데다 캐릭터나 스토리 모두 상식적인 수준 밖에 기억 못하지만, 일부러 원작에 대한 정보를 구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무대가 11세기 스코틀랜드에서 1970년대 가상의 도시로 옮겨졌다는 점, 또, 권력에 눈이 먼 왕 맥베스는 능력과 매력을 겸비한 특공대장으로, 맥베스를 부추겨 피의 향연을 벌이게 만든 레이디 맥베스는 야망 넘치는 카지노 업주로, “맥베스가 왕이 되리라!” 예언했던 여신 헤카테와 세 마녀는 도시를 지배하는 마약상으로 변신한 점은 초반 ‘작가의 말’과 각주를 통해 본의 아니게 예습(?)할 수 있었습니다.
불행한 고아 출신에 약물중독자였던 맥베스는 경찰사관생도를 거쳐 특공대장에 이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카지노 업주 레이디의 연인이기도 한 그는 25년간 도시를 지배했던 부패한 경찰청장 사후 조직의 3인자에 등극합니다. 하지만 “맥베스가 경찰청장이 될 것이다.”라는 마약상 헤카테의 말에 현혹된 레이디로부터 “신임 경찰청장을 제치고 도시 권력의 정점에 서야 한다.”는 부추김을 받은 맥베스는 처음엔 다소 소극적이었지만 첫 번째 피맛을 본 뒤로 광기 어린 폭주를 시작합니다. 수많은 인물들이 무자비하게 제거되면서 맥베스의 지위는 점차 상승합니다. 레이디로부터는 광기의 에너지를, 마약상 헤카테로부터는 마약과 폭력을 제공받은 맥베스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채 폭주하지만 그의 정점은 너무나도 짧고 허망했습니다.
맥베스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것은 물론 마약에 취해 악몽에 시달리는 명백한 ‘악당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맥베스에 대한 레이디와 헤카테의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레이디는 그를 “용감하고 가차 없는 행동주의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독기가 없고, 이른바 정의를 사랑했고 남들이 정한 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인물”(p156~157)로 여겼고, 마약상 헤카테는 “사랑에 홀딱 빠진 마약쟁이 겸 도덕주의자”(p188)라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맥베스는 작품 내내 다중적인 캐릭터를 발산합니다. 탐욕스런 살인자이자 유년기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마약과 악몽에 시달리는 가련한 인물이기도 하며, 또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죽인 인물들에 대한 지독한 회한에 빠지는 인물 등 단지 권력욕에만 매달리는 악당보다는 상처 입은 처연한 캐릭터라고 할까요?
어쩌면 맥베스에게 중요한 건 권력이 아니라 레이디를 향한 사랑이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처음과 끝이었고 그의 탄생이자 삶이자 죽음”이라는 표현대로 그의 폭주는 레이디 때문에 시작됐던 것이고, 그의 몰락 역시 레이디의 파멸과 부재(不在)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레이디를 기쁘게 하기 위해 권력투쟁과 살육전에 나섰지만, 레이디가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깊은 혼란에 빠지거나 과도한 광기를 증폭시켰고, 레이디가 자신을 떠난 뒤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는 꼴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원작과 무관하게 한 편의 스릴러로서의 ‘맥베스’의 미덕은 별 5개도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맛봤던 지독한 폭력과 우울감은 여전했고, 깊은 울림과 능구렁이 같은 매끈함을 선사하는 요 네스뵈의 필력도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늘 비 또는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인 채 마약, 폭력, 살인, 부패경찰이 지배하는 도시 속에서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그 자체로 페이지터너입니다.
다만, 별 0.5개를 빼게 만든 딱 한 가지 아쉬움은 주인공들의 ‘변화’에 관한 설명이 많이 부족했거나 설득력이 약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레이디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해도 능력과 매력을 겸비한 특공대장 맥베스가 스스로 권력투쟁과 살육전에 뛰어드는 계기는 읽는 내내 ‘목에 걸린 가시’마냥 설득력이 약해 보였습니다. 애초 그는 권력엔 조금도 관심 없는 철저한 ‘현장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던 레이디도 중반에 갑자기 캐릭터가 변하는데, 물론 그럴 만한 사건이 있긴 하지만 다소 설명이 부족하거나 비약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주인공의 ‘변화’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인데, 다 읽은 지금까지도 ‘왜?’라는 질문이 여전히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대표작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간됐는데, 찾아보니 반갑게도 그 목록 가운데 길리언 플린의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더구나 집필한 작품이 ‘햄릿’이라니 더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작품은 몰라도 길리언 플린의 ‘햄릿’만큼은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