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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살인범
마리온 포우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8년 6월
평점 :
두 명의 인물이 한 챕터씩 번갈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의 미스터리입니다.
한 명은 옆집 모녀를 살해한 죄로 현재 치료감호소에 구금된 자폐증세가 있는 남자 레이,
또 한 명은 특별한 인연 탓에 레이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변호사 이리나입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문제아 기숙학교를 전전하던 레이는 뛰어난 제빵사가 됐지만
성인이 되고도 사회적 관계에 미숙한 채 수족관 속의 물고기에게만 애정을 쏟습니다.
옆집에 매력적인 여인 로지타가 어린 딸 안나와 함께 이사온 뒤로 레이의 삶은 요동칩니다.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딸을 낳았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막장 같은 삶을 사는 로지타에게
레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물심양면으로 헌신합니다.
하지만 그는 로지타와 딸 안나를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체포되고 맙니다.
명망 있는 로펌에서 파트타임 변호사로 일하는 이리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아들 애런을 키우며 고군분투하는 미혼모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살인범 레이와의 특별한 인연을 깨달은 이리나는
그와의 면회 이후 확실한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그의 결백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이 작품의 장르는 미스터리지만, 큰 얼개는 비극적인 가족사입니다.
살인범 레이는 9살 나이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뒤 자폐증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왔고,
변호사 이리나는 위로는 불편한 어머니에, 아래로는 통제불능의 4살 아들에게 시달립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고, 아이 아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레이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로지타는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잠자리 파트너 외에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갑니다.
이렇듯 비극적이거나 불안정한 가족사를 끌어안은 인물들이 살인사건으로 엮인 셈인데,
그래서인지 진실이 무엇이든 엔딩이 행복하게 그려지진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살인사건의 진범과 동기와 진실,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 등
미스터리의 큰 그림은 다소 단선적이고 상투적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이리나의 탐정 역할이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한 점,
중요한 변곡점마다 우연에 기대거나 안이해 보일 정도로 쉬운 해결책을 모색한 점,
막판에 드러난 진실 자체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설계된 점이 아쉬웠고,
결국 미스터리는 비극적인 가족사의 무게감에 비해 너무 가볍게 그려졌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움의 실체에 대해 좀더 설명을 하고 싶지만, 그럴 경우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고,
출판사의 소개글 역시 그 대목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듯 해서 이 정도만 얘기하겠습니다.)
자주 만나기 어려운 네덜란드 미스터리인데다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와 선명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미덕이라 할 수 있지만,
미스터리 자체의 힘이 다소 취약했던 점은 옥의 티였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2008년에 발표됐는데) 작가의 후속작이 한국에 출간된다면
한번쯤은 찾아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족으로...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 중에 하나는 제목입니다.
원제인 ‘The Girl In The Dark’조차 작품 내용과 잘 매치되지 않아 보였고,
번역제목인 ‘옆집의 살인범’은 스토리는 담고 있지만 마케팅 면에선 부적절해 보였습니다.
제목에 대놓고 ‘살인범’이 들어갈 경우 다분히 눈길을 끌려는 상업적 의도가 느껴지거나
반대로, 작품 자체가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선입견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문 중에 등장하는 ‘옆집 괴물, 레이’가 훨씬 더 적절한 제목으로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