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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잇 블리드 ㅣ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지역구 주민들의 민원 상담을 하던 톰 길레스피 의원 앞에
얼마 전 출소한 매커널리가 나타나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의원을 일부러 찾아와 보란 듯이 방아쇠를 당긴 것.
뭔가 감추는 듯한 의원의 태도에 리버스는 불시에 그의 집을 방문하고,
급하게 문서들을 파쇄 중이던 의원의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을 발견한다.
전과자의 우발적 자살로 사건을 종결지으려는 상부에 반발해 독자적인 수사를 하던 리버스는
경찰 수뇌부는 물론 감찰부서와 정치권의 압력까지 받던 끝에 강제로 휴직당하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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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하고 괴팍하면서도 반골 기질로 가득한 존 리버스 형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네 번째 작품인 ‘스트립 잭’을 제외하곤 그의 시리즈를 모두 읽었는데,
영미권 또는 북유럽권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던 건
아마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라는 좀 특별한 무대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어딘가 불안정하고 뾰족뾰족 모난 느낌이 드는 분위기는
실제로 그곳에 가보지 않은 건 물론 딱히 해박한 지식 없이도
다른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접한 존 리버스 시리즈는 확실히 색다른 분위기의 스릴러로 읽혔습니다.
‘렛 잇 블리드’에서 존 리버스가 마주한 사건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경제적 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방의회, 경제 관련 정부부처, 재벌, 경찰조직 등이 총출동한 가운데
살인, 자살, 납치 등 다양한 미스터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됩니다.
전작인 ‘치명적 이유’에서 세대를 이은 정치적-종교적 갈등과 파벌주의를 다룬데 이어
또 다시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삼은 셈인데,
특히 이번에는 존 리버스로 하여금 꽤나 심각한 딜레마까지 겪게 만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의와 도덕, 그리고 보편적 공익에 관한 딜레마인데,
본문에 이를 압축적으로 묘사한 ‘악당의 변명’이 등장합니다.
“한 아이가 사과를 좀 훔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많은 생명을 구하는 의사가 됐어요.
굳이 그를 법정에 세워 어릴 적에 벌인 절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더 자세한 언급은 곤란하지만,
어쨌든 존은 진실에 다가갈수록 ‘악당의 변명’이 건넨 딜레마 때문에 고민에 빠집니다.
이는 ‘범죄 관련자 대부분이 고위직이라 폭로될 경우 에든버러에 치명타’라는 딜레마를 다룬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숨바꼭질’과도 궤를 같이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초반부터 전방위적인 수사 중단 압박이 가해지고 끝내 강제휴직까지 당했던 시점에는
순수한 분노와 올곧은 정의감으로 중무장한 채 반골의 끝판왕처럼 수사에 매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존은 자신의 도덕률과 보편적 공익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읽고 보면 미스터리 자체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살, 살인, 납치 등 대부분의 사건이 단선적인 맥락에서 발생했고,
결정적 단서는 약간의 행운과 함께 존의 손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전작인 ‘치명적 이유’가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종교적 갈등에 대한
상세하고 장황한 묘사 때문에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됐다면,
‘렛 잇 블리드’는 스코틀랜드의 정치권과 관료 시스템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
비슷한 성격의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어서 역시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큰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막판에야 설명된 그 ‘큰 그림’은 어딘가 결과론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맞춰진 퍼즐 같다고 할까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그동안 꾸준히 등장했던 조연들의 캐릭터입니다.
어느 새 직장인이 된 딸 새미(사만다)는 아버지 존과 직업적 문제로 갈등하게 되고,
시리즈 첫 편인 ‘매듭과 십자가’에서 연인이 됐다가 금세 헤어진 질 템플러는
존의 임시 상관으로 부임한 뒤 존을 끝없이 압박하는 나쁜 간부로 등장합니다.
역시 전 연인인 페이션스나 얄미운 경찰 동료 플라워는 계속 존과 악연을 이어갑니다.
물론 늘 존의 아군이던 브라이언 홈스와 쇼반 클락은
위험을 무릅쓰고 존의 불법적인(?) 암행수사를 돕는 매력적인 활약을 보여줍니다.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긴 했지만 존 리버스 시리즈를 쭉 읽어온 독자 입장에선
그래도 그의 독설과 지독한 반골 기질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존 리버스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느낌표보다는 의문부호가 더 떠오를 것 같은데
시리즈 첫 편부터 순서대로 읽다보면 이 시리즈만의 묘한 중독성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